교황 비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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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년 5월 9일 [[시에나]]에서 난노 토데스키니(Nanno Todeschini)와 라오다미아 피콜로미니(Laodamia Piccolomini)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라오다미아는 훗날 [[교황 비오 2세]]가 되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누이이다.<ref>Munman, Robert, ''Sienese Renaissance tomb monuments'', (DIANE Publishing Co., 1993), 112.</ref> 프란체스코는 외가인 피콜로미니라는 이름과 피콜로미니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추측컨대 어렸을 때 삼촌인 에네아 실비오의 집안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그의 동생 안토니오는 교황 비오 2세의 재위기간 중에 [[아말피]]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일찍이 [[페루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460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에나 교구의 [[대주교]]로 수품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5일에는 산 에우스타치오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ref>Williams, George L., ''Papal Genealogy: The Families And Descendants Of The Popes'', (McFarland & Company Inc., 1998), 50.</ref> 몇달 후에 비오 2세는 피콜로미니 추기경에게 경험 많은 [[마르시코]]의 주교를 조언자로 붙여주고 [[안코나]]에 교황특사로 파견하였다. 프란체스코는 학구적이고 능력이 뛰어난 인물임을 증명해 보였다. 또한, 그의 사생활은 건전하고 예의가 바르고 교양이 있었다.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1464년 [[교황 바오로 2세]](1464–1471)가 선출된 [[콘클라베]]에는 참석하였지만, 1471년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가 선출된 콘클라베에는 불참하였다.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교황의 사절로서 다른 나라로 종종 파견되곤 하였다. 바오로 2세 때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레겐스부르크 회의에 파견되었으며, 식스토 4세 때에는 [[움브리아]]에서 교회의 권위가 회복됨에 따라 그곳에 파견되었다.<ref>''The Encyclopaedia Britannica'', Vol.19, Ed. Thomas Spencer Baynes, (Henry G. Allen Company, 1890), 153.</ref>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1484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출된 콘클라베와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선출된 콘클라베에 참석하였다. 1497년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후안 보르자]]가 살해당하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교황청]]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피콜로미니 추기경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