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전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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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남부동맹 육군]] [[로버트 리]] 장군의 [[북버지니아군]]이 연방의 [[포토맥군]]을 [[챈슬러즈빌 전투]](1863년 [[5월 1일]] ~ [[5월 15일]])에서 격파하고 승리한 지 얼마 후에, 리 장군은 2번째 북부 침공을 결정했다. 이 행동은 북군의 여름 작전 계획을 막고, 남군에겐 라파하노그 강의 배후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고, 북부의 풍부한 농원에서 얻은 물자로 군대에 보급하는 동안, 전쟁으로 황폐화된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에 숨돌릴 수 있는 휴식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D.C.]]를 위협하여 당시 북부에서 일고 있던 평화운동을 고무시키고자 했다. 리의 목적은, 이로써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부의 독립을 인정하게끔 강요하여 전쟁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었다.<ref>리는 [[제프 데이비스]] 남부동맹 대통령의 군사 고문으로서 남부동맹 정계의 움직임도 잘 알고 있었고, 이번 침공에서 데이비스와 남부동맹의 정치적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ref> 리는 [[4월 19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인용문2| 다음 가을에 북부에서 여론을 크게 변화시켜야만 한다오. 공화당을 무너뜨려,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화하게 해, 이를 추진하려는 다음 정권이 들어서야만 한다오<ref>Sears, p. 15. </ref>.}}
 
남부동맹 정부는 북군에게 위협받던 [[빅스버그 (미시시피 주)|빅스버그]]와 포위된 빅스버그 수비대를 구원하기를 리에게 바랐지만, 리는 군대를 파견하는 직접적인 구원이란 제안을 거부하고, 북동부에서 타격을 집중시키는 게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ref>Coddington, pp. 5-7; Sears, p. 15. </ref>.
 
기본적으로 리의 전략은 [[1862년]] [[메릴랜드 전역]]에서 사용했던 전략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었다. [[앤티텀 전투]] 때 리가 군단지휘관에게 보낸 유명한 명령서(191호)를 북군의 [[조지 매클라렌]]소장이 입수해, 리가 충분히 군대를 모으기 전에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매클라렌이 침공군을 격파했다는 비밀을 극히 최근에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조지프 후커]]에 대한 북부침공을 성공시켰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거기에 [[챈슬러즈빌 전투]] 후, 자신의 군대에 최고의 신뢰를 가졌기에 그들이라면 리가 생각한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ref>Sears, pp. 13-14. </ref>.
 
[[1863년]] [[6월 3일]],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프레더릭스버그 (버지니아 주)|프레더릭스버그]]를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리의 기동 계획은 [[셰넌도어 계곡]]을 통해 [[메릴랜드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를 거쳐 북군의 후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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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을 마친 뒤 ==
게티즈버그 전역은 리가 마지막으로 추진한 대규모 공세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북버지니아군의 전투 작전은 북군에 주도권을 내주고 끌려다니게 되었다. 리는 27,0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북군의 피해는 약 30,100명이었다<ref>Sears, p. 498. 게티스버그 전투의 손실에 더해서 북쪽으로의 행군과 철수 기간 동안 약 4,500명의 손실이 발생했었다. </ref>. 남부 입장에서는 견뎌내기 힘든 손실이었다. 그리고 게티즈버그 전역은 애초 리가 목적한 바를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이 원정을 추진하게 된 원인이었던 빅스버그만 해도, 리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한 다음 날인 [[7월 4일]]에 [[율리시스 그랜트]]에게 항복한 것이다.
 
그러나, 미드는 리가 탈출하게 내버려두었다고 비난을 샀다. 이것은 앤티텀 전투 후 조지 매클라렌의 상황과 같은 경우였다. 하지만 미드는 비록 리를 물리쳤다고는 하나, 신중한 선택이었다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링컨의 압력으로, 그는 가을에 [[브리스톨 전역]]과 [[마인런 전투]]를 치렀다. 두 전투 모두 리를 패배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두 번 모두 미드가 패했다. 미드는 게티즈버그에서 그의 행동과 포토맥 강에서 리에게 당한 패전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 전쟁수행위원회]]에서 정적들로부터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