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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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되어 칼럼을 송고하던 중 폐렴과 결핵 등의 악화로 [[양주군]] [[진건면]]으로 내려와 요양하는 한편 칼럼, 강연 활동에 초빙되어 전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고, 8월 20일에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여기서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1950년]] [[1월]] 다시 장편소설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자동차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떠났다.<ref>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동아시아 출판사, 2006) 130쪽. </ref> 1950년 10월 25일. 향년 59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