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선진리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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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가쓰노부|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 (건조물)|왜성]]을 쌓았고,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다다쓰네|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 선진리 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틈을 노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ref>[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 조명군총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
 
이후 [[조선 숙종|숙종]] 때에 [[진보]]가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였고, 해안을 방어하였다. 또, [[영조]] 36년([[1760년]]) 진주에 설치된 가산창의 방어 임무와 호위를 맡은 능노군, 포수, 화포수, 사궁으로 이루어진 군이 주둔하였다.<ref name = "h">< /ref>
 
구한말인 [[1895년]] 통제영을 비롯한 모든 군영이 해체될 때 선진리성에 설치된 진보도 해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ref name = "h">< /ref>
 
[[1918년]]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성을 매수 또는 기부받아 공원으로 정비하고 그 위에 조상을 기리는 석비를 세웠다. 하지만, 해방후 석비는 마을 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1978년]] 공원 내에는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가 세워졌으며 현재 시마즈 가문이 세웠던 비석 터에는 [[한국전쟁]]중 순국한 공군장병의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ref name = "h">< /ref>
 
[[1936년]] 고적 81호에 지정된 뒤, [[1963년]] 사적 50호로 지정되었고, 끝으로 [[1998년]] 지방문화재 자료 27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