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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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의 성장 ===
{{출처 필요 문단}}
크라수스의 아버지는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이다. 크라수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형제를 잃었고 [[기원전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기간에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를 잃었다.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술라파를 숙청할때 크라수스는 [[킨나]]의 박해를 피해서 [[히스파니아]]로 도망했고 [[기원전 84년]] 킨나가 죽은 뒤 아프리카로 가서 술라의 편에 합세했다. 술라가 로마로 다시 돌아올때 크라수스는 술라의 충실한 협력자로 함께 로마로 입성했는데 이때 로마의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라수스는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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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쿠스 전쟁 ===
{{출처 필요 문단}}
때마침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 전쟁|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 최고의 장군 [[루쿨루스]]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으로 동방에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인 [[세르토리우스]]와의 전쟁으로 [[히스파니아]]에 가 있었다. 초기에 반란은 원로원의 안일한 대응으로 규모가 더욱 커졌고 급기야 2명의 집정관이 토벌군으로 나섰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모두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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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정치에서의 경력 ===
{{출처 필요 문단}}
[[기원전 70년]] . 두 사람은 서로의 야망을 위해 술라의 정책을 무효화하고 서로 보이지 않게 경쟁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을 토벌하고 아시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기원전 65년 크라수스는 감찰관이 되었고 자신의 엄청난 부를 이용하여 로마에서 우호세력을 만들었는데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돈을 꾸어 주는 방식으로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기원전 62년에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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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티아 원정과 죽음 ===
{{출처 필요 문단}}
[[기원전 55년]] 크라수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이후 [[파르티아]]와 로마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두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길 원했고 그것을 파르티아와의 전쟁중에 이루려고 애썼다. 초반에 파르티아를 상대로 너무나 쉽게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였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너무 깊숙이 쳐들어갔다. 그러나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 군은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고 크라수스의 아들은 전사하고 크라수스도 적의 계략에 말려서 살해당했다. 약 4만명의 파르티아 원정군중 살아서 도망친 로마병사는 약 1만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로마군은 참패했다. 이때,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로마 기병 500기를 이끌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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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수스의 재산 ===
후세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크라수스의 재산 총액은 약 1억 7천 40만 세스테리우스라고 하며 이는 기원전 67년 로마 공화정의 연간 예산인 2억 세스테리우스에 근접하는 수준이다.<ref>로마인 이야기{{쪽}}</ref> 또한 크라수스는 [[포브스]]지가 2008년에 선정한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에서 1698억 달러를 기록하여 8위를 차지하였다. <ref>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쪽}}</ref>
 
==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