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수행계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3번째 줄:
<br>불자여, 다시 이 지(地)에서 바르게 일조지(一照智)를 관하는 가운데 백만 아승기의 공덕문에 들어가느니라. 일상관 중에서 일시에 행하여 나아가 제십지(第十地)에 이르기까지 온갖 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무구지(無垢地)에 흘러드느니라.
<br>불자여, 다시 이 지에서 일조지로써 일체의 업인업과(業因業果)를 명료히 이해하되 법계를 하나로 관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것은 지혜로써 일체 중생의 식(識)이 처음 일상(一相)을 일으켜 연(緣)에 머무는 것을 아는 것이니라.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따라서 일어남을 선(善)이라 하고 제일의제를 등지고 일어남을 번뇌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주지(住地)로 하기 때문에 생득(生得)의 선(善), 생득의 번뇌라고 하고, 이 두 가지 선과 번뇌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후의 일체 선악을 일으키느니라. 일체법의 연(緣)에 따라서 선과 번뇌의 이름이 생기고, 행위 함으로써 선을 얻고 행위 함으로써 번뇌를 얻지만 마음은 선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니라. 이 두 가지를 따라 이름을 얻기 때문에 선과 번뇌의 두 가지 마음이 있느니라. 욕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욕계주지(欲界住地)라고 이름하고, 색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색계주지(色界住地)라고 이름 하며, 마음[心]의 번뇌를 일으키므로 무색계주지(無色界住地)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 네 가지 주지(住地)로써 일지(一地)의 번뇌를 일으키므로 처음 일어나는[始起] 것을 사주지(四住地)라고 하고, 이 사주지 앞에 다시 법이 일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시(無始)의 무명주지(無明住地)라고 하느니라. 금강지(金剛智)로써 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상(一相)은 끝이 있음을 아느니라. 그러나 또한 그 최초의 앞에 법이 있는지 법이 없는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지만, 선천적으로 얻는 일주지(一住地)와 행위 함으로써 얻는 삼주지(三住地)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시작을 알고 끝을 알 수가 있느니라. 이 무구(無垢)보살은 일체지로써 가지런히 자지(自地)를 알고 항상 제일의제 속에 머물면서 자연히 '''묘각해지'''(妙覺海地)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br>불자여, 이 '''묘각지'''(妙覺地) 중에 머물러 오직 화(化)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을 나타내자면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 있느니라. 그 가운데 일체(一體)를 출생하면 이른바 '''묘과'''(妙果)가 항상 청정하게 머무는 것이 허공과 같아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고 이름으로 들어갈 수 없으나 '''과분'''(果分)은 얻을 수 있느니라."}} 여기서의 [[계 (불교)|계]](界)는 어떤 부류{{.cw}}범주{{.cw}}영역{{.cw}}구역{{.cw}}세계{{.cw}}경지{{.cw}}상태를 말한다.{{sfn|곽철환|2003|loc="[http://terms.naver.com/entry.nhn?cid=2886&docId=896959&categoryId=2886 계외(界外)]". 2013년 5월 6일에 확인|quote=<br>"계외(界外):
어떠한 부류·범주·영역·구역·세계·경지·상태의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