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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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이름=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br />Henri de la Tour d'Auvergne, Vicomte de Turenne
|생애=[[1611년]] [[9월 11일]] - [[1675년]] [[7월 27일]]
|그림=Henri de la Tour d'Auvergne-Bouill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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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르틀링겐 전투 (1645년)|뇌르틀링겐 전투]]
*[[추스마르샤우젠 전투]]
[[상속 전쟁]]<br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뒨 전투 (1658년)]]
*[[투르크하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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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렌 자작(子爵)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Henri de la Tour d'Auvergne, Vicomte de Turenne, [[1611년]] [[9월 11일]] - [[1675년]] [[7월 27일]])는 저명한 군인이자 [[프랑스 원수]](元帥;Marshal of France)로써 흔히 '''튀렌'''(Turenne)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가문인 [[라 투르 도베르뉴]]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군사 역사상 단 6명만 임명된 [[프랑스 대원수]](Marshal General of France)중 1명이었다.
 
== 배경과 초기경력 ==
[[개신교]]인 [[부용]] 공작 [[부용 공작-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앙리]]([[스당]]의 영주)와 2번째 아내 [[엘리자베트 프랑드리카 드랑쥬 나소]] 사이에서 차남으로 [[스당]] 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네덜란드 총독]] [[빌렘 1세]]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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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용 공작 앙리가 [[1623년]]에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단련에 몰두하여 태어날때부터 약점이던 허약체질을 벗어나려고 했다. 14살때 그는 숙부인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배우도록 보내졌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군사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처음엔 숙부 마우리츠의 경호를 맡은 사병이 되었다.
 
[[1625년]] 숙부 마우리츠의 뒤를 계승한 또 1명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덜란드 총독 및 [[오라녜 공작]]에 즉위한 후 [[1626년]] 조카인 튀렌을 육군대위로 승진시켰다. 젊은 하사관은 그 시기 포위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1629년]] [[스베르트 헨보스]] 포위전 승리에서 보인 튀렌의 수완과 용기는 당대 일류 사령관 중 1명이었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640년 튀렌은 네덜란드를 떠나서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군대 내에서의 승진예상 뿐 아니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부용 공작가문의 주권과 충성을 보여주기 원했던 모친의 바램이 동기가 되었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 튀렌을 보병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오라녜공과 단기간 거리를 좁혔다(네덜란드와 프랑스는 당시 동맹관계였다). 튀렌이 프랑스군에 있으면서 벌인 최초의 실전은 [[1634년]] [[Jacques-Nompar de Caumont, duc de la Force|포르스 공작]]이 지휘한 [[로렌]]의 [[라 몽드 앙 바시니]] 포위전이었다. 그가 돌격때 보인 전공으로 육군 소장의 지위로 단숨에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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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년]] 튀렌은 루지용을 정복한 프랑스군의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때 리슐리외 추기경은 튀렌의 형인 부용 공작 [[프레데리크 모리스]]가 연루된 [[생 마르 후작 앙리 코와피에 드 뤼제|생 마르 후작]]이 꾸미던 리슐리외 시해 음모를 발견하였다.
 
== 프랑스 원수 ==
프랑스 왕가와 스당의 공작가의 관계는 튀렌의 초기경력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때에 따라서는 부용 공작가를 회유하기 위해 이 군인을 승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명확했으나, 또 한편으로 리슐리외 및 [[마자랭]]에게 대항하는 공작가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국왕의 측근들은 전장에 보낸 장군을 전폭적으로 신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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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투는 콩데 공작이 1650년 1월에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콩데 공작과 더불어 체포될 계획이 있었던 튀렌은 그때 도망쳐 롱그빌 공작부인 안느와 만나 콩데 공작, 그의 동생 아르망, 롱그빌 공작의 목적을 위해 스타네이를 확보했다. 프롱드의 난 제1차, 2차도 안느에 대한 애정이 튀렌의 행동을 지배했었던것으로 보이고, 콩데 공작을 위해 스페인의 원조를 얻었다. 이 전투에서 튀렌은 루트르에서 2,3번의 역전 중 하나를 생각했다(1650년 12월 15일). 그러나 2번째 대립은 같은해 빠른시기에 왕당파의 와해와 콩데 공작의 석방으로 종결되었다.
 
== 프롱드의 난 과 루이 14세 시대 ==
튀렌은 화해하고 1651년 5월 파리에 돌아왔다. 그러나 곧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콩데 공작이 다시 프랑스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 프롱드의 난 제3기에서 튀렌과 콩데 공작은 서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다. 튀렌은 왕의 군대를 지휘하고, 콩데 공작은 반란파와 스페인 연합군을 이끌었다. 1652년 3월 28일 자르조에서 젊은 병사의 용맹함을 튀렌은 보여주었고, 4월 7일 지안에서 베테랑 장군의 수완과 사나움을 보여주었다. 튀렌은 실질적인 상트노레 포 브르 전투(7월 21일)에서 내전을 깨뜨렸고, 10월 21일 다시 파리를 왕당군이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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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아내 샤를로트 사이에서 교환된 편지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과도 밀접한 이 사건에 대해 효과적인 증언을 배울 수 있었다. 2년 후 샤를로트가 죽고 편지 교환이 끝나고, [[자크 베니뉴 보쉬에]] 주교의 열변과 튀렌의 조카의 설득으로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했다(1688년 10월). [[1667년]] 튀렌은 결국 왕당군으로 돌아왔고, 프랑스군의 남부 네덜란드 침공을 지휘했다(보통은 루이 14세가 지휘). 곧이어 왕과 화해한 콩데 공작은 [[프랑슈콩테]] 지방을 재빨리 정복하여 튀렌과 전공을 다투었고, 1668년 2월 [[네덜란드 계승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종결로 이끌었다.
 
== 대 네덜란드 전쟁 ==
루이 14세가 [[1672년]] 네덜란드 전쟁을 일으키자, 튀렌은 네덜란드 여러 주를 황폐화시키고, [[암스테르담]] 시를 항복시키려고 프랑스군을 이끌었다. 루이 14세가 실행한 이 수단은 오라녜 공작 [[빌렘 3세]]에게 가혹한 저항운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빌렘 3세는 제방을 무너뜨려 암스테르담 주위의 국토를 침수시켰다. 이 영웅적인 방법은 완전히 튀렌을 견제하게 만들었고, 루이 14세는 지휘를 포기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유럽전역으로 퍼졌고, 전투는 독일에까지 넓혀지게 되었다. 튀렌은 콩데 공작이 알자스를 제압하는 사이 라인강 중류지역에서 책략을 꾸며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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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 7월 27일 최초의 일제사격이 튀렌을 전사시켰고 그의 전사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 전역이 비탄에 잠겼다.
 
== 남겨진 유산 ==
몬테쿠롤리는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절규했다.
"존경했던 한 남자가 오늘 죽었다!"("II est mort aujourd'hui un homme qui faisait honneur à l'hom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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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희생이 많고, 그리고 매우 많은 훈련을 쌓은 상비군을 위해 그리고 루이 14세 시대의 왕조전쟁을 위해 튀렌은 이상적인 군사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 참고문헌 ==
{{1911브리태니커|TURENNE, HENRI DE LA TOUR D'AUVERGNE, VICOMTE DE}}
{{commons|Henri de la Tour d'Auvergne-Bouillon}}
 
 
[[분류:프랑스의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