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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유학과 독립운동 ===
남궁염은 [[1888년]] [[3월 17일]] [[한성부]] 정동에서 [[남궁억]]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배재학당]] 에서 영어를 배우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개화파 인사 [[박영효]]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버지니아 주]] [[랜돌프 매건 대학]]을 다녔다. [[랜돌프 매건 대학]]에 재학 중 우연히 [[이승만]]을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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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로 활동하였다.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 외교관, 교민단체 활동 ===
남궁염은 이승만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와 함께 뉴욕동지회를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하였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남들처럼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뉴욕총영사가 되어 활동했다.<ref>"정부인사발령", 동아일보 1949년 02월 23일자 1면, 정치면</ref> 한편 그의 부인 우복자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동지회의 지부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매년 하순 혹은 가을에 개최되는 미국내 한인대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