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균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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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균'''(金百鈞, 생몰년 미상)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장인이자 [[고종후]], [[고인후]]의 외할아버지이다.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의 문과에 합격한 뒤 [[홍문관]][[부제학]]과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이기 (1476년)|이기]](李芑)의 문인이다. 자는 의중(宜重),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전라남도]] 출신.
 
== 생애 ==
[[전라남도]] [[진원군]](珍原郡) 출신으로, 목사(牧使)를 지낸 [[김응두]]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기 (1476년)|이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9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직후 스승 이기의 천거로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이 되고 이후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스승 [[이기 (1476년)|이기]]가이기가 몰락한 뒤, [[김여부]](金汝孚)에게 미움을 받아 뜻을 얻지 못하고 외직으로 전출되었다. 뒤에 [[김여부]]의김여부의 측근이 되어 요직으로 복귀하고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다시 [[윤원형]](尹元衡)에게 붙어 그의 측근이 되어 요직을 지냈다.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를 거쳐 [[1554년]] 강원도도사, [[1558년]]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후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며 8촌 인척간인 [[심강]]을 찾아갔고, 이후 [[심강]]과심강과 인순왕후의 외숙부인 [[이량 (조선)|이량]]의 세력으로 요직에 발탁되었다.
 
[[1558년]] [[사간원]]정언,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등을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그해 [[10월]] [[세자]][[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에서사간원에서 그의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종]]이명종이 듣지 않았다. 이후 [[사간원]]과사간원과 [[승정원]]이 그의 시강원관직이 적합하지 않음을 들어 여러번 반대, 체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 뒤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 (조선)|이량]]의이량의 심복이 되어 옥당에 들고 이후 [[1559년]] [[부교리]], [[사헌부]][[장령]], [[부교리]], [[필선]], [[1560년]] 홍문관 부응교, 사헌부 장령, 다시 [[홍문관]][[부응교]]를 거쳐 [[홍문관]][[응교]], [[경연]][[시독관]] 등을 지냈다. 그해 [[11월]]에는 경연시독관으로 재직 중 임금이 [[술]]을 내렸는데 술이 반쯤 취하자 조신들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사관이 시독관 김백균이 중사(中使)와 무례하게 농지거리하였는데 심지어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귀에 대고 소곤거렸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아부를 잘한다고 지목하였다고 비아냥하였다.
 
[[1561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행[[홍문관]][[전한]](行弘文館典翰)을 지냈다. 한편 [[1561년]] [[8월]] 자신에게 밉보인 [[보성]][[군수]] [[정맹남]](鄭孟男)의 탄핵을 사주하여 파면시키기도 했다. 전한(典翰)으로서 진원(珍原)에 귀성(歸省)한 적이 있었는데, 진원은 보성(寶城)과 이웃하고 있었다. 그때 김백균이 요청하는 것이 많았는데 정맹남이 따르지 않으니, 김백균이 매우 성이 나 조정에 돌아와서 대간에 부탁하여 파면시켰다.
 
그해 [[8월]]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사간, [[홍문관]][[직제학]], [[승정원]][[동부승지]]를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부제학]]과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562년]] 예조 참의, 좌부승지를 거쳐 특명으롤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그해 [[9월]] 간원들을 이끌고 [[조광조]] 등의 사면복권 등을 건의한 [[허엽]], [[구수담]] 등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공격여론을 조성하였다. [[1563년]] [[5월]] [[호분위]][[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1563년]] [[6월]] 사간원 대사간으로 복직하고, 8월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9월 부사직(副司直)으로 전임되었다.
 
[[1563년]](명종 18년) [[10월]] [[이량]]일파가 조정에서 축출될 때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그러나 양사에서 계속 공격하여 [[1565년]](명종 20년) 문외출송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