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 (189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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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몇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뒤 [[경교장]]을 반납받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그의 가세가 기울면서 경교장은 처분되어, 여러 손을 거쳐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의 소유가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특별시|서울]]에 남아있었으나 무사히 살아남아 전쟁 이후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다.<ref>[[네이버]] 백과사전 등 [[대한민국]]의 일부 자료에는 그가 [[한국 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역시 금광으로 부자가 된 [[조선일보]]의 전 사주 [[방응모]]와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된 기록이다.</ref>
 
[[1955년]] 12월에는 세금 포탈 혐의로 치안국에 구속되었으나,<ref>{{뉴스 인용 |제목 = 崔昌學氏拘束(최창학씨구속) 利殖令等違反嫌疑(이식령등위반혐의)|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120700209203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2-07&officeId=00020&pageNo=3&printNo=10110&publishType=00020|출판사 = [[동아일보]]|저자 = |쪽 = 3면|날짜 = 1955-12-07|확인날짜 = }}</ref> [[1957년]]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 해 [[오산고등학교 (서울)|오산중·고등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五山中高理事長(오산중고이사장)에 崔昌學氏(최창학씨)가就任(취임)|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7020600329203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02-06&officeId=00032&pageNo=3&printNo=3512&publishType=00020|출판사 = [[경향신문]]|저자 = |쪽 = 3면|날짜 = 1957-02-06|확인날짜 = }}</ref> [[1959년]] [[10월 12일]] 한국식 나이로 69세를 일기로 수도의과대학(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崔昌學氏別世(최창학씨별세)|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91014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10-14&officeId=00020&pageNo=3&printNo=11513&publishType=00010|출판사 = [[동아일보]]|저자 = |쪽 = 3면|날짜 = 1959-10-14|확인날짜 = }}</ref>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