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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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중국]] [[짱수 성]] [[상하이]]에서 일하던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영 J. 앨런|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888년]] [[9월 28일]] 상해를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 11월 4일 미국 테네시 주의 내시빌에 도착했다.<ref>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70페이지</ref> 그는 곧 [[밴더빌트 대학교]][[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미국]]인 죄인들에게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ref name="cc1"/> [[조지아 주]]에 가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기도 했다.<ref name="cc1"/>
 
한편으로 그는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교제,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조선]]을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와 [[성경사]] 교수 호스,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적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ref name="cc1"/>
 
[[1888년]] [[테네시 주]] 하니발에서 그리고 에모리 대학 재학 중인 [[1892년]] [[옥스퍼드]]에서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대통령의 민선 광겨을 목격하고, 미국인들의 고도의 정치의식과 자유로운 정치토론 , 그리고 국민의 여론과 다수결에 의해 통치자가 선출되는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목격하였다.<ref name="risis77">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77페이지</ref> 그리고 그는 조지아 주의회 및 미연방 상, 하원을 견학하여 국민의 대표자들이 제정한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고, 민의가 반영되는 합의의 정치 곧 [[의회민주정치]]의 일단을 주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흑인 강도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고, 방대한 인원구성과 피의자의 충분한 변호 그리고 증거에 의한 판결과 공개재판 등 인권보장의 장치가 잘 갖추어진 [[미국]]의 [[사법 제도]]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ref name="risis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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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mory Glenn Chapel.jpg|180px|right|thumb|모교 [[에모리 대학교|에모리 대학]] 전경]]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그는 주로 [[신학]](神學)과 [[영어]] 등을 배웠으며, 1891년 초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밴더빌트]] 졸업 직후 윤치호는 [[조지아 주]]로 건너가 [[조지아 주]] [[카빙턴]](Covington)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1891년]] 가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한다. 이 기간 중 그는 [[성서]]사학자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박사,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 호스 박사, 에비 호스 부인, 조선에 있던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이씨, 삼촌 윤영렬 등이 보내주는 용돈 외에도, 스스로 강연과 상점 점원, 사탕수수 농장, 식당 서빙, [[오렌지]] [[농장]], [[커피]] 농장의[[농장]]의 열매 수확 등의 아르바이트를[[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한다. 낮선 환경에서 넉넉치 않은 환경은 그의 체력과 학업에 어느정도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 에모리 대학 수학과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