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대학교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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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부산의 대표적 악덕 재단인 김임식 재단이 돈벌이 하려 직원들이 대학 입시 부정(언론 확인)을 저지른게 원초적 원인이다. 전영옥 전 국회의원 자료 참조
 
[[1989년]] [[3월 14일]] [[동의대학교]] 영문과 김창호 교수가 "우리 대학 입시에 부정사례가 있어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학교측이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동의대 사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url=http://www.independent.co.kr/news_01/n_view.html?id=24385&kind=menu_code&keys=1
|출판사=독립신문
|저자=
|쪽=
|작성일자=2009-02-28
|확인일자=2009-03-10
}}</ref>
 
[[1989년]] [[3월 21일]] [[동의대학교]] 총학생회 간부 등 50여 명이 양심선언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총장실 점거농성을 시작하였다. 점거농성은 [[5월 3일]] 강제 해산시까지 이어졌다.
 
[[1989년]] [[5월 1일]] [[노동절]] 집회를 마친 학생들이 중간 투표 약속을 불이행한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 14시 30분경 100여 명이 교문 밖 500m까지 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학교밖 500m 거리에 소재한 가야 파출소에 화염병 10여 개를 던져 유리창이 깨지고 화재가 일어났다. 경찰은 학생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하고 주동자 정 모 씨를 검거했다. 시위학생들은 쇠파이프 등으로 파출소장을 폭행한 뒤 도주했으며 다시 동료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100여 명이 화염병 50여 개를 투척하며 파출소를 기습했다. 파출소장은 경고 뒤 다시 공포탄 발사를 통해 시위대 해산을 유도했다.<ref name="newdaily.co.kr">{{뉴스 인용
|제목= 화염병, 납치…동의대 사태 일지
|url=http://www.newdaily.co.kr/_ezarticle/?im=artView&artid=1066069600
|출판사=뉴데일리
|저자=
|쪽=
|작성일자=2009-03-10
|확인일자=2009-03-10
}}</ref>
 
[[1989년]] [[5월 2일]] 15시 30분경 300여 명이 전일 파출소 습격에 의한 공포탄 발사를 계기로 ‘경찰총기난사 규탄실천대회’를 벌인 다음 교문 밖으로 진출해 재차 화염병을 투척했다. 경찰이 본 시위에 참가한 장 모 씨 등 8명을 추가로 검거하자 학생들은 학교 밖 300m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부산 사복80중대(2080) 소속 [[전투경찰]] 5명을 납치하고 학내에 감금하여 폭행했다. 학생들은 5명의 전경을 납치한 이후 5월 1일부터 시위중 연행된 학생 9명과 교환을 제시했다.<ref name="newdaily.co.kr"/>
 
학생들은 경찰의 수회에 걸친 전경 석방요구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조건(경찰이 연행된 학생 8명의 석방의사를 밝혔지만 구속영장이 신청돼 임의석방 불가능한 정 모 씨까지 석방요구)을 내세워 이에 불응하였으며, 경찰이 납치된 전경 5명을 구출하기 위하여 농성장소인 도서관 건물에 진입하기 직전 이를 통고받은 대학교 총장의 설득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총학생회는 [[5월 2일]]에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전투경찰을 석방하겠다고 밝혔으나, 부산진경찰서장은 [[5월 3일]] 오전 3시경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을 하여 학교측에 학내진입을 통보하였다.<ref name="ohmynews.com">{{뉴스 인용
|제목= 사망 경찰 과반수는 소사 아닌 추락사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81581&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NEW_GB=
|출판사=오마이뉴스
|저자=
|쪽=
|작성일자=2009-03-06
|확인일자=2009-03-06
}}</ref>
 
경찰이 학생들에게 납치된 전경을 구출하기 위해 도서관에 진입하자 학생들은 미리 진입로에 설치한 가연물질 트랩에 화염병을 투척, 경찰관 7명이 숨지고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다음은 대법원의 판결문에서 사건 발생 상황을 인용한 것이다.
 
{{인용문|..피고인들이 도서관에 농성중인 학생들과 함께 경찰의 도서관 건물에로의 진입에 대항하여 바리케이트 등을 치고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방법으로 강력히 저지하기로 하여, 도서관 건물의 현관입구에는 빈드럼통 등으로 도서관 1층 홀과 1층에서 4층 사이의 계단등에는 책상과 걸상 등으로 각 장애물을 설치하고 화염병이 든 상자, 천조각, 두루말이 휴지 등 가연물질이 많이 모여있는 7층 세미나실 복도와 8, 9층으로 통하는 계단에는 석유를 뿌려놓고 경찰이 도서관 건물에 진입하자 현관입구, 1, 2층 사이의 계단, 7층 세미나실 복도, 8, 9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경찰관의 직무집행을 방해하고 이로 인하여 7층 세미나실 복도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결과 7명의 전경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 의자 등에 경찰이 맞거나 미끄러져..<ref>[http://glaw.scourt.go.kr/jbsonw/jbsonc08r01.do?docID=351267AB57D140A8E0438C01398240A8&courtName=&caseNum=90도767&pageid=# 대법원 동의대사건 판결 (90도767)]</ref> }}
 
사망한 경찰관의 사인은 소사(燒死) 3명, 추락사 4명이다. 추락사한 4명은 건물 남쪽 창틀에 배달려 있었지만 경찰이 시위학생 투신에만 대비해 다른 방향에 매트리스를 설치하였다가 경찰관 3명이 추락하고 나서야 그물을 펼쳤다. 4번째 추락한 경찰관은 심장파열로 사망하였고, 이후 시위학생 1명이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매트리스가 추가로 설치되었다.<ref name="ohmynews.com"/>
 
사건 이후 언론은 [[학생운동]]의 극렬한 투쟁방식을 비판했고 당국은 소위 원천봉쇄 등과 같은 강력 진압 방침을 천명했다. 동의대학교 총장은 위 동의대사건의 관련자들 120명에 대해, 구속기소된 75명은 전원 제적처분을 했다.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학생 10명 전원과 처음부터 불구속으로 입건된 16명 중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15명은 전원 무기정학처분을 하였으며, 무기정학처분을 받은 학생들 중 단순가담자 23명에 대하여는 곧바로 징계해제조치를 했다. 법원에서는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방화치사상죄를 인정, 31명의 학생에게 징역2년에서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했다.
 
==사건에 대한 의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