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전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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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 ==
[[파일:Yellow Emperor.jpg|thumb|right|황제]]
[[한나라|한대]] [[사마천]]의 역사서인 《[[사기]]》에 의하면, 소전(少典)의 아들이 헌원이라 하며, [[치우]]를 물리치고 [[신농]]에 이어 제왕이 되었다고 한다.하며, 황제의주나라 무덤은 중원 허난성이 아닌 남방희성의 후베이성에조상이라고 위치한다주장하였다. 과거에특히 4명의 제왕([[전욱공손]], [[제곡]],가문이 [[요황제의 (군주)|요]],후손을 [[순주장한 (군주)|순]])이이후에 황제의 자손이라는성이 주장도공손씨로 있어,기록되고 있다. 성씨들이 모두주나라 희성이라고도시대 여겨왔다.희성은 반면 각 군주에서 파생된황제의 성씨에는후손이라는 차이점이인식이 존재하고없었고, 모계한나라 사회에서는왕족도 성씨가유방의 없거나아버지 모계신분이 부족미천하여서 성을황제에 이어가는관심이 풍습도없었으나, 있어사마천의 부계주장에 혈통의의거하여 연속성은황제에서 검증비롯되는 한족 민족 없다.정체성이 일반적으로생겨 [[하나라|하]] 사성과 [[주나라|주]] 희성의 선조로 여겨지기도 한다났다.
 
황제의 출자는 [[진나라]] 중국 통일 이후 생겨났다.생겨났는데, 진시황제가진시황제는 왕보다 높은 칭호을 원했고, [[이사]]는 삼황오제을삼황오제 합쳐 황제라는 명칭을 만들어 시황제에게 바쳤다. 진나라 시대 황제는 헌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신화속 인물 삼황오제을 모두 포괄하여 만들어진 존칭이었다. [[한나라]] 왕조는 [[저장성]]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어서 황제 후손 의식은 없었고, 황제 칭호을 사용한 진왕조에 비판적이었다.특히 '헌원'이라는 이름은 [[한나라|한대]]의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인 《[[사기]]》에 처음 등장하였다. 실제로 어떤한 신화을 근거로 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당나라 왕족도 헌원의 후손을 주장하였는데, 사마천이 헌원은 주나라의 조상이라는 기록을 근거하여 당나라 왕족이 주씨로 바꾸는 사례가 있었다.
 
사마천은 고대 전설의 군주을 모두 같은 가계로 기술하여, 고대 군주는 모두 희성이라는 인시도 생겨 났다.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거주하는 한족은 중원 사람들과 유전적 유사점이 없었으며, 중원 사람들과 혈통적으로 거리가 먼 DNA을 가진 남방 한족이라고 한다. 맹자의 경우 오제의 부계가 일치하지 한다고 보지 않았고, [[주나라]] 사람들이 서이(西夷)라면서 본래 중원에 살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본래 황제는 삼황, 오제의 합성어로 단일 인물을 가리키지 않았으나, 당나라 황제가 천황을 자체하면서 황제 헌원의 개념이 생겼다. 또한 헌원은 주나라 희성의 선조이므로 [[당나라]] [[현종]] [[이융기]]가 주씨로 바뀌고, [[정나라]] 공족 '공손씨'가 헌원의 후손을 주장해 헌원은 공손씨라는 이야기도 만들어 졌다. 또한, 황제는 [[청나라|청대]] 말기에 혁명파가 황제가 즉위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황제기원|황제기원(黄帝紀元)]]'을 사용하여 청나라 왕조에 대항하는 한족 저항 의식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고대에 관한 야사을 수집하였고, 그들을 가계을 모두 같게 만들어 황제의 자손으로 일원화 했다. 그의 논리는 돌려서 말하면 모든 중국 지배층은 황제의 자손이라는 개연성 없는 주장을 하였다. 특히 사마천 자신이 씷어했던 진나라의 조상을 전욱의 후예라고 하였다. 헌원이 실제로 어떤 점이 훌륭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 한데, 막연한 우상이 되어 있는데, 주나라 민족이 그 정통성을 갖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된 측면이 강하다.
사마천은 고대 전설의 군주을 모두 같은 가계로 기술했다. 중국 과학원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거주하는 한족은 중원 사람들과 유전적 유사점이 없었으며, [[묘족]]등 기타 중국의 소수 민족 보다도 중원 사람들과 혈통적으로 거리가 먼 DNA을 가진 남방 한족이라고 한다. 단일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유독 아시아에서는 단일 민족론의 개념이 강한데, 중국에서는 [[베이징 원인]]이 서아시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자생했다는 이론도 있다.
 
황제는 중국 중의학이나 풍수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도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고 양택풍수의 고전서인 '황제택경'(黃帝宅經)도 포함된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ref>빈미정, 〈황제신화전설에 대한 문헌적 고찰〉, 《중국문학》제44집, 2005</ref>이와 함께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ref>김종미, 〈중국문헌(中國文獻)에 나타나는 "치우(蚩尤)"의 이중형상(1) -제국(帝國)의 희생양, 치우(蚩尤)의 악마형상-〉, 《중국어문학지》, 2007 / 김선자,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 책세상, 2007</ref>
기록에 의하면 황제의 가계가 [[하나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현재 까지 하나라 문명의 구체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실존성이 고증되지 않았으며, 고대 부족 사회는 중앙 집권 체계가 아니므로 국가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하나라 [[우왕]]의 무덤이 저장성 [[사오싱]]에 있고, 헌원의 무덤은 [[후베이성]] [[시링 구]]에 있어 중원 [[허난성]]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맹자의 경우 오제의 부계가 일치하지 한다고 보지 않았고, [[주나라]] 사람들이 서이(西夷)라면서 본래 중원에 살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서이는 주로 중국 남부 [[후베이성]]이다.
 
이러한 바탕위에 최근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전욱]], [[제곡]], [[요 (군주)|요]], [[순 (군주)|순]])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보고 있다. [[훙산 문화]]를 꽃피운 것은 '황제'(黃帝)이고 '황제족'(黃帝族)이라는 논리에서 나온 결론이다. 후계자 [[전욱]]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었다. 뉴허량 유적(신전)에서 하늘과 땅의 관계를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바로 [[전욱]]이라는 것이고 3대 황제, [[제곡]]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는 역설이다.
사마천은 고대에 관한 야사을 수집하였고, 그들을 가계을 모두 같게 만들어 황제의 자손으로 일원화 했다. 진나라은 영성이므로 조씨이고, 그래서 전욱의 후예라는 것이 사마천의 주장이다. 그러나 진의 시조가 주나라에 침략한 [[서융]]을 방어한 공으로 영성이 수여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시황제]]가 조나라을 싫어해 주나라 수도 [[한단]]을 직접 불태운 일도 있었다. 조나라와 그 선조는 [[산융]] 지역 출신이다. 서이(徐夷)족이라는 이민족이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영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개념의 편리을 위해 진나라 유민들의 성씨도 영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나라]] [[전한 고조|고조]] 때 [[노관]](盧綰:루완)이라는 사람이 동호로 도망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손은 선비족으로 분류되겠지만 실제로는 여성 노씨이다. 이와같이 [[선비족]]이라고 다 같지 않듯이, 영성이 반드시 조씨라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헌원이 실제로 어떤 점이 훌륭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 한데, 막연한 우상이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묘족]]을 물리 치고, 한족의 터전을 세웠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한족의 주장일 뿐이고, 특정 민족을 차별하는 요소도 있다. [[묘족]]은 실제로 한족 만큼 인구수가 많은데, 중국 성을 쓰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려울 뿐이다. 중국 대부분의 성에 묘족 계통이 있다. 한족은 다른 민족을 오랑캐로 부르기을 좋아하는데, 사실 진왕조가 중국을 통일 했을 때 주나라, 초나라, 제나라 공족들이 요하지역 즉, 요서, [[요동]]으로 달아나 [[동호]] 계열과 결합하여 [[오랑캐]]화 된 것이 [[선비족]]의 일부가 되므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요소도 있다.
 
[[중국]]에서는 [[징기스칸]]도 헌원의 후예라거나 또는 본래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중국]] 일각에 존재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하나라]] 사씨 왕족이 [[흉노]] 땅으로 달아나 왕이 되므로, [[징기스칸]]도 황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때문에 5호 16국 시대 [[흉노족]]의 국호을 [[하 (오호 십육국)]]로 정하기도 하였다. 북방과 중원의 인적 교류는 가능하지만 [[징기스칸]]의 부계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황제는 중국 중의학이나 풍수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도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고 양택풍수의 고전서인 '황제택경'(黃帝宅經)도 포함된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ref>빈미정, 〈황제신화전설에 대한 문헌적 고찰〉, 《중국문학》제44집, 2005</ref>이와 함께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ref>김종미, 〈중국문헌(中國文獻)에 나타나는 "치우(蚩尤)"의 이중형상(1) -제국(帝國)의 희생양, 치우(蚩尤)의 악마형상-〉, 《중국어문학지》, 2007 / 김선자,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 책세상, 2007</ref>
 
[[중국]]에서는 황제의 자손으로 족보을 만들면 황제의 자손으로 정의 되는 경우가 많다. 때대로 중화민족주의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자신의 가문을 포장하기 위해서 고대 부터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족보을 날조 하는 경우가 많은데, 황제라는 개념은 거의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집단 최면, 또는 강박증 같은 것으로, 황제의 자손이어야 자신의 가문이 높아진다는 의식이 바탕에 있다.
 
이러한 바탕위에 최근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전욱]], [[제곡]], [[요 (군주)|요]], [[순 (군주)|순]])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보고 있다. [[훙산 문화]]를 꽃피운 것은 '황제'(黃帝)이고 '황제족'(黃帝族)이라는 논리에서 나온 결론이다. 후계자 [[전욱]]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었다. 뉴허량 유적(신전)에서 하늘과 땅의 관계를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바로 [[전욱]]이라는 것이고 3대 황제, [[제곡]]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는 역설이다.
 
[[중국]]은 이미 ‘[[하상주단대공정]]’을 단행, 전설상의 [[하나라]] 건국연대를 [[기원전]] [[2070년]]으로 올려 확정한 상태이다. 이렇게 올려놓은 중국역사가 4000년을 넘고 그런 중국학계가 이젠 더 나아가 발해문명과 [[훙산 문화]]를 창조한 이가 바로 황제이며, 그 황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다시 전설의 1000년 역사가 ‘사실(史實)’로 회복되는 셈이다. 이른바 중국문명 5000년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화문명탐원공정]]’의 핵심이다. <ref name="중국황제족"/> <ref name="황제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