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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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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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이 때 세시봉이라는 음악 다방에서 [[윤형주]], [[송창식 (가수)|송창식]], [[김세환 (가수)|김세환]], [[김민기 (1951년)|김민기]], [[양희은]] 등 여러 가수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조영남은 세시봉 활동 때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는데, 〈신고산 타령〉 을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로 개사하여 불렀다가 미움을 사서 군대에 입대하였다.<ref>윤형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8/2011102801204.html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28> '엉뚱함의 최고봉' 조영남], 조선일보</ref> 군대에 다닐 무렵, 당시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를 부를 것을 요청받았지만 분위기를 띄울 목적으로 〈각설이 타령〉 을 불러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 다니면서 그림그리는 취미를 길렀으며 제대 후 [[1973년]]에 서울 여의도 세계 복음화 대성화 특송가수로 등단하고 [[1974년]]에는 미국 가수 알 월슨이 [[빌보드]] 싱글 차트 27위까지 진출하여 성공한〈The snake〉를 가사만 대한민국의 분위기로 바꾼 번안곡〈최진사댁 셋째딸〉 을 처음으로 발표하여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때 성가를 부른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미국 [[플로리다]] [[:en:Trinity University (Texas)|텍사스 샌 안토니오 트리니티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당시 세시봉에서 만난 [[윤여정]]과의 인연으로 [[1975년]]에 그녀와 미국 시카고에서 결혼했다.
 
[[198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고 가수 [[김도향]]과 함께 음악작업을 하면서 그와 함께 음반을 발매하며 활동을 해왔다. 조영남은 결혼 후 윤여정 사이에 2남을 두었으나 성격차이와 본인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점으로 결국 [[1988년]], 결혼 13년만에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공백기를 가졌다. 공백 기간 동안 [[조영남]]과 같이 지내며 의지가 되어주었던 [[김한길]]과 함께 지냈을 무렵, 어느 날 신문에 [[화개장터]] 기사를 보고 소설가로 활동하던 [[김한길]]이 가사를 쓰게 되었다. 그 가사에 조영남이 직접 작곡한 멜로디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곡명을 〈[[화개장터]]〉로 하고 앨범을 발표하였다. 데뷔 이후 번안곡이나 성가를 주로 불러 국민들에게 널리 불려지는 히트곡이 없었는데 〈[[화개장터]]〉가 히트하면서 조영남을 TOP 가수 반열에 오르게 하여 80년대 최고의 가요로 자리잡았다. 또한 사랑노래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도 [[김한길]]이 작사하였고 이 곡도 히트하였다. [[1988년]]에 두 곡이나 히트하게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정상에 오른 조영남은 여러 공연과 무대에 출연하여 인기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1989년]]에 [[자니 윤]]이 진행하는 KBS2 《[[자니윤 쇼]]》에 보조 진행자로 활동한 후 1990년 대에 들어서면서 가수로서의 조영남보다는 방송인으로서의 조영남이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1993년]]에 [[이경실]]과 함께 1대 진행자를 맡은 KBS2 《[[체험 삶의 현장]]》이 주목을 받았다. [[1995년]]에 백은실과 결혼하고 딸을 입양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현재는 딸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조영남은 가수가 아닌 화가로도 활동하면서 화투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화투화가의 영역을 개척했으며 동시에 약 10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한데, 그 중에서 [[2005년]]에 쓴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의 경우 각종 친일 발언으로 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