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로버트 오펜하이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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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정보
| 이름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br />John Robert Oppenheimer
| 그림 = JROppenheimer-LosAlamos.jpg
| 그림 크기 = 22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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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 [[페르미상]](1963)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ohn{{llang|en|Julius Robert Oppenheimer}}, [[왕립 학회|FRS]], [[1904년]] [[4월 22일]]~[[1967년]] [[2월 18일]])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과 [[독일]]에 유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장이 되어 여러 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계획]]을 수행하였다. [[1950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였다가 모든 공직에서 쫓겨난 것으로 유명하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2|제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세 계 인 명/오펜하이머 (Oppenheimer, John R.)|오펜하이머 (Oppenheimer, John R.)]]}}</ref>
 
[[1962년]] [[5월 2일]] 영국 [[왕립 학회]]의 국외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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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그의 관심은 광물 표본의 수집, 물리학, 화학 그리고 문학으로 발전해 갔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그의 학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부모의 걱정은 다른 아이들과는 거의 함께 놀지 않는 그의 성격에 있었다. 성적은 뛰어나지만 운동신경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행동이 분명하지 못하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곧 얼굴을 붉히며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넋 빠진 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14살 때 여름 캠프에서는 고자질했다는 친구들의 오해로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갇혀서 하루밤을 지새우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끝까지 잘 견뎌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1925년에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3개월 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벤디시 연구소(물리학 연구소)의 [[J.J. 톰슨]] 밑으로 유학을 갔다. 이미 화학의 기초는 물리학이라는 것에 주목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화학을 배운 그가 갑자기 실험물리학의 세계로 뛰어들어 흥미를 갖게 될 수는 없었다.
 
악전 고투 끝에 결국은 포기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밑으로 옮겨 가서 이론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화학에의 응용분야인 스펙트럼의 양자론을 공부한다. 여기에는 [[닐스 보어]]의 결정적인 조언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6년서부터 1929년까지 괴팅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당시 괴팅겐에 함께 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유진 위그너]]와 [[엔리코 페르미]] 등 20세기 물리학을 걸머지고 나가게 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연속 스펙트럼의 양자론 이라는 학위 논문 외에 16편의 논문을 이 기간 동안에 쓰고 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