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희 (194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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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진도희 (陳都希)''' 70년대 한국 영화배우 (본명: 김태야) 1949년 12월 부산 출생 (본적: 경북 선산 구미) 1965년 동래여고 재학 시 이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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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동래여고 재학 시 이화여대 백일장 당선
 
1968년 서라벌 예대 (현 중앙대) 문예창작과 입학
 
1970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편입 (1973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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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영화배우 진도희는 1949년 부산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사촌 형제는 고 김승목 국회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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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스타'''
 
이 후 진도희는 ‘춘추전국시대’영화계의‘춘추전국시대’ 때 나오미, 홍세미 등과 함께 대스타 신인들의 물망에 올라 주연급 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란'춘추전국시대'란 대한민국 영화사에 획을 그은 남정희-문희-윤정희-남정임 1세대 트로이카와 정윤희-장미희-유지인 2세대 트로이카 사이에 껴 있었던 1970년대 초반, 선두주자 없이 비슷한 인기를 갖고 있던 여배우들의 시대를 일컫는 기간이다. 이 시절 주요 배우들에는 진도희, 나오미 (가수 아이돌 ?의가수의 엄마모친). 박지영, 우연정, 윤연경최정민, 전영윤세희, 오유경윤미라, 최정민박지영, 윤세희윤연경, 윤미라전영, 오유경 등이 있다. 진도희와 함께 영화에 출연한 남자 배우들은 신성일, 신일용, 신영일, 박근형, 백일섭, 남궁원 등이 있다.
 
 
'''문학 소녀에서 등단 시인으로'''
 
진도희는 서구적인 마스크와 훤칠한 외모로 한 때 글래머 여배우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일본의 잡지 등에 지적인 학사 배우로 대서 특필 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각종 문학상들과 이화여대 백일장 수상까지 휩쓸었고 훗날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에서 당선을 하여 오랜 기간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필명은 본명이다.
 
 
'''잠적'''
 
1973년 정인숙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송상옥 원작의 [죽어서 말하는 여인]에 캐스팅 되었으나 갑작스런 하길종 감독의 국토개발징집으로 인해 고영남 감독으로 바뀌면서 영화가 처음의 시나리오와 다르게 만들어지자 영화계에 실망을 느껴 잠적해버렸다. 그러자 와병설, 재벌 2세와의 결혼설 등 숱한 추측성 기사가 주간지를 장식했다. 진도희가 왕성한 영화 활동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은막에서 잠적을 한 이유들 중에는 당시 유학파 금융재벌 3세와의 열애가 실제로 작용했다. 그와 딸을 하나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헤어진 뒤 한 때는 아이의 양육권 마저도 포기했었다고 전해진다. 하길종 감독은 제대 후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별들의 고향(속)>으로 화려하게 컴백하면서 진도희의 잠적을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메니저 김학훈'''
 
진도희의 메니저는 도금봉, 김혜정(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전처), 윤정희(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처)를 담당했었던 김학훈이다. 그는 진도희를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TV출연도 까다롭게 선별하여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지 못하게 할 만큼 공을 들였다. 그는 진도희를 간혹 유명인들과 TV에 출연하여 기타를 연주하거나 동시대 톱 탤랜트들과 인텨뷰를시사 토크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는 정도만 허락한허락했던 엄격한 메니저였던메니저였다. 그는이후 진도희의 열애설과 관련한 갑작스러운 영화 활동 중단 선포에 충격을 받고 당대 유명 여배우들과의 왕성했던 메니저 활동에서 영구 은퇴하였다.
 
 
'''국제 영화제 여배우 대표'''
 
진도희는 1973년에 영화배우 남궁원과 함께 대한민국 여배우 대표로 파라왕정파라 왕정 이란의 테헤란 영화제에 참석하여 당대 유명 헐리우드 스타들과 인사를 하며 파라 국왕비를 직접 알현하기도 했다.
 
 
'''최근이후 동정'''
 
진도희는 3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스타의 반열에서 수많은 영화에 출연 하였으며 수십 장의 잡지 표지 모델, 각종 패션 쇼 특별 출연 등 쉴 틈 없이 활동을 하였고하던 급작스러운 잠적급작스럽게 잠적하였다. 그 와중에 아이를 출산하고 3년 만에 잠시 다시 잡지에 얼굴을 비친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었다. 그 후 외식사업과 무역회사 중역으로 미국을 오가면서 바쁘게 지내던 1982년 배우시절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제작하는 영화에 같이 투자를 하며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어 8년 만에 다시 한동안 주간지에 오르내렸다. 허나 머지 않아 미국 뉴욕으로 도미하여 배우로서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않으며 종교에 심취하여심취하기 살고 있다고 한다시작하였다. 진도희가 왕성한 영화 활동 당시 갑작스럽게 은막에서 잠적을 한 이유는 당시 유학파 금융재벌 3세와의 열애 때문이었다. 그와 딸을 하나 두고 있으나 오래 전 헤어진 뒤 한 때는 아이의 양육권마저도 포기했었다고 전해진다.
 
 
'''“젖소부인” 논란'''
 
영화배우 한지일은 70년대 톱스타로 부상했던 ‘진도희’의 예명을 의도적으로 자신이자신의 키우던기획사 에로소속의 여배우에게에로배우에게 붙여줘붙여주며 물의를 빚었다. 한지일은 1995년 ‘젖소부인’ 시리즈의 에로배우로 활동한 김은경(본명)에게 진도희란 예명을 지어줘사용하게 하며 ‘원조’ 진도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불편을 끼쳤다. 실제 ‘원조’ 진도희는 1995년 ‘젖소부인’ 진도희가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 원로배우 윤일봉을 통하여 한지일 측에 예명 사용 중단을 요청했다. 한지일은 2005년 8월 EBS에서 영화배우 진도희의 70년대 영화가 방영 된 후 시청자들의 문의와 반향이 따르자 뒤늦게 “예명의 주인이었던 영화배우 진도희씨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