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희 (194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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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출신 배경'''
 
영화배우 진도희는 1949년 부산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대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사촌 형제는 고 김승목 국회의원이다.
 
 
'''탤런트 공채 합격과 화려한 영화배우로의 데뷔'''
'''데뷰'''
영화배우 진도희는 동국대학교 재학시절 교내 연극의 여주인공으로 뽑히면서 알게 된 국립극단장의 권유로 MBC 공채 4기에 응시하여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김경아라는 예명으로 MBC 4기 탤런트가 되었다. 6개월 뒤 선배 탤런트 태현실의 권유로 배우 박노식(탤런트 박준규의 부친)의 감독 데뷰 작품인 '쟈크를 채워라'(1972년)에 주연으로 캐스팅 되면서 영화배우가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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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국제 소녀에서영화제 등단여배우 시인으로대표'''
 
진도희는 1973년에 영화배우 남궁원과 함께 대한민국 여배우 대표로 파라 왕정 이란의 테헤란 영화제에 참석하여 당대 유명 헐리우드 스타들과 인사를 하며 파라 국왕비를 직접 알현하기도 했다.
진도희는 서구적인 마스크와 훤칠한 외모로 한 때 글래머 여배우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일본의 잡지 등에 지적인 학사 배우로 대서 특필 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각종 문학상들과 이화여대 백일장 수상까지 휩쓸었고 훗날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에서 당선을 하여 오랜 기간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필명은 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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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작스러운 잠적'''
'''국제 영화제 여배우 대표'''
 
1973년 정인숙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송상옥 원작의 [죽어서 말하는 여인]에 캐스팅 되었으나 갑작스런 하길종 감독의 국토개발징집으로 인해 고영남 감독으로 바뀌면서 영화가 처음의 시나리오와 다르게 만들어지자 영화계에 실망을 느끼고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와병설, 재벌 2세와의 결혼설 등 숱한 추측성 기사가 주간지를 장식했다. 실제로 진도희가 왕성한 영화 활동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은막에서 잠적을 한 가장 이유는 당시 유학파 금융재벌 3세와의 열애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영화계를 떠나 있는 동안 그와 딸을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헤어진 뒤 한 때는 아이의 양육권 마저도 포기했었다고 전해진다. 하길종 감독은 제대 후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별들의 고향(속)>으로 화려하게 컴백하면서 진도희의 잠적을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진도희는 1973년에 영화배우 남궁원과 함께 대한민국 여배우 대표로 파라 왕정 이란의 테헤란 영화제에 참석하여 당대 유명 헐리우드 스타들과 인사를 하며 파라 국왕비를 직접 알현하기도 했다.
 
 
'''문학 소녀에서 등단 시인으로'''
'''잠적'''
 
진도희는 서구적인 마스크와 훤칠한 외모로 한 때 글래머 여배우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일본의 잡지 등에 지적인 학사 배우로 대서 특필 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각종 문학상들과 이화여대 백일장 수상까지 휩쓸었고 훗날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에서 당선을 하여 오랜 기간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필명은 본명이다.
1973년 정인숙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송상옥 원작의 [죽어서 말하는 여인]에 캐스팅 되었으나 갑작스런 하길종 감독의 국토개발징집으로 인해 고영남 감독으로 바뀌면서 영화가 처음의 시나리오와 다르게 만들어지자 영화계에 실망을 느끼고 침체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와병설, 재벌 2세와의 결혼설 등 숱한 추측성 기사가 주간지를 장식했다. 실제로 진도희가 왕성한 영화 활동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은막에서 잠적을 한 가장 이유는 당시 유학파 금융재벌 3세와의 열애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영화계를 떠나 있는 동안 그와 딸을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헤어진 뒤 한 때는 아이의 양육권 마저도 포기했었다고 전해진다. 하길종 감독은 제대 후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별들의 고향(속)>으로 화려하게 컴백하면서 진도희의 잠적을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후영화 그 이후의 동정'''
 
진도희는 3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스타의 반열에서 수많은 영화에 출연 하였으며 수십 장의 잡지 표지 모델, 각종 패션 쇼 특별 출연 등 쉴 틈 없이 활동을 하던 중 급작스럽게 잠적하였다. 그 와중에 아이를 출산하고 3년 만에 잠시 다시 잡지에 얼굴을 비친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었다. 그 후 외식사업과 무역회사 중역으로 미국을 오가면서 바쁘게 지내던 1982년, 배우시절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제작하는 영화에 같이 투자를 하며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어 8년 만에 주간지에 오르내렸다. 허나 머지 않아 미국 뉴욕으로 도미하여 배우로서의 삶을 드러내지 않았으며않았으나 중년부터동료 종교에연예인들과 심취하기꾸준히 시작하였다교류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