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40번째 줄:
[[임영대군]]의 15대손이었으나 가계는 몰락하여 그는 무학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던 중 [[박영효]]에게 발탁되어 그의 청지기가 되었으며, [[1883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천거로 [[일본]]에 유학, [[토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에 조련국 소속 군사들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일본]]으로 망명, 이후 망명과 귀국을 반복하다가 [[1907년]] [[7월]] [[조선 고종|고종]] 퇴위 후 사면되어 귀국했다. 이후 [[통위영]] 정령관, [[경무청]] [[경무관]]과 [[경무부사]]를 역임했다. [[일본]]에서는 [[김옥균]]을 살해하도록 사주받은 [[박영효]] 암살 미수범 [[이일직]] 무리를 사전에 잡아 일본 경찰에 넘겼다.<ref name="daddad403">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박광희 역, 다산초당, 2010) 403페이지</ref> 이후 [[중추원]] 부찬의,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이후에도 [[강원도]][[도지사|도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강원도]][[도지사|도장관]]과 [[함경남도]] [[도지사|도장관]]을 지냈으며, [[1924년]] 사직서를 제출한 뒤 [[중추원]] 참의직과 고위직 제안을 물리치고 시골로 내려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는 [[조선인]]들도 [[일본]]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 획득론을 주장하였다. [[1924년]] [[동양척식회사]]의 고문을 지냈고, 해방후 [[강원도지사]] 고문을 지냈다. [[춘천농공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이기도 하다. 춘천농공고는 [[1910년]] [[4월 29일]] 당시 강원도 관찰사인 이규완이 초대 교장을 겸임하고, 사립 측량학교를 가교사를 빌려 1년제의 춘천공립실업학교를 개교한 뒤 그 해 9월 춘천공립농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ref>[http://www.kwnews.co.kr/nview.asp?s=501&aid=210042600140 “100년의 전통 1,000년을 이어갑니다”] 강원일보 2010.04.27</ref>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고,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이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