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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 17년([[212년]]), 마초는 서융의 강족과 융족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거병하여, 마침 하간<ref>기주의 속군</ref>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조조가 서둘러 철수한 빈 틈을 노리고 농상을 공격했다. 농상 지방의 군과 현들은 기를 제외하고 모두 마초에게 호응했으며, 또 한중의 [[장로 (후한)|장로]]도 마초에게 원군을 보내 주었다. 마초는 양주자사 [[위강 (후한)|위강]] 등 자사 · 태수들이 항전하는 기성을 정월부터 8월까지 공격하였으며, 구원군이 오지 않아 희망을 잃은 기성의 관리들은 결국 마초와 화의를 맺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이러던 중 5월에 조정에 있던 아버지 [[마등]] 등의 일족은 마초의 죄에 연좌되어 삼족이 모두 멸한다. 마초는 입성한 뒤 화의를 깨고 [[양앙]]을 시켜 위강 등 자사와 태수들을 살해하고 기성을 거점으로 그 군세를 부하로 흡수했다.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이라 칭하고 병주목을 겸무해 양주의 군사도독이 되었다. 9월, 원래 위강의 부하 [[양부]]와 강서가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초가 출진하지만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 틈에 양관과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기성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으므로 마초는 진퇴양난에 빠져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도주하여, [[장로 (후한)|장로]](張魯)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장로에게 군대를 받아 [[윤봉]], [[조앙 (후한)|조앙]]이 지키고 있는 기산을 공격했으나, [[하후연]]이 보낸 [[장합]]의 원군을 보자 달아났다.
 
마초는 [[장로 (후한)|장로]]를 따른 후부터 종종 북쪽으로 진군해 양주 탈환을 노리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장로 (후한)|장로]]는 마초가 바라는 대로 군사를 내주었지만, [[장로 (후한)|장로]]의 장군 양백 등이 마초의 능력을 비난하자 설자리를 잃은 마초는 무도에서 [[저족]]이 사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초는 투병중이라서 [[장로 (사람)|장로]]의후방의 진지에 남아있는 [[방덕]]을 버리고 [[마대 (촉한)|마대]](馬岱) 혼자만 데리고 가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로가 이 상태로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점이다.가버렸고, 이 일로 인해 [[방덕]]은 위에 투항하여 [[관우]]와 대적하게 된다.
 
[[214년]] [[유비]](劉備)가 성도의 [[유장 (후한)|유장]](劉璋)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서를 보내 항복을 알리고 [[촉한]]으로 도망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전에 [[장비]]와 둘이서 호각지세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이회 (촉한)|이회]](李恢)의 설득으로 [[유비]]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사자]]머리 투구와 은으로 만든 갑옷, 하얀색 도포 차림새로 등장해 ‘금(錦)마초’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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