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다마소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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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교회와의 관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를 필두로 동방 교회는 아리우스주의와의 싸움에서 다마소 1세의 지지와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마소 1세는 이 위대한 [[카파도키아]] [[교회박사]]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멜레티우스 이교]] 문제에 있어서 다마소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및 그의 후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2세|페트로스 2세]]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바울리누스|바울리누스]]를 지지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니케아에서 고백한 정통 신앙을 진실되게 따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레티우스가 선종하자 다마소 1세는 후임 주교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플라비아누스 1세|플라비아누스]]는 후보 명단에서 제외하였다.<ref>[[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 《Historia Ecclesiastica》 5.15</ref>
 
== 생애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08-07}}
다마소 1세의 재위 중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다마소 1세는 재위 초기부터 아리우스주의자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황후 유스티나의 정치적인 힘을 업고 중요한 교구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다른 소수의 분열자들도 있었다. [[369년]] [[일리리쿰]]의 두 주교 우르사치우스와 발렌스를 파면시키고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티우스에게도 조치를 취하였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성 암브로시오]]는 다마소 1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아리우스주의를 공격하였다. [[378년]] 개최된 로마 교회회의에서 결정된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는 주교들은 일반 재판소의 심리를 받지 않고 같은 성직자의 심문이나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면제권은 영구히 보존되었다.
 
[[동방 정교회|동방교회]]와는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위일체]]에 관한 용어를 놓고 카에사리아의 바실리오스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안치라의 마르첼로가 제기한 이단적 삼위일체 논쟁은 374년 그의 죽음으로 끝났고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의 이단적 그리스도론은 [[375년]] 공적으로 단죄되었다.
 
다마소 1세는 건축 외에도 순교자들의 공경에도 열성적이어서 [[카타콤베]]의 순교자들의 묘소를 복구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