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다마소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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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교회와의 관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를 필두로 동방 교회는 아리우스주의와의 싸움에서 다마소 1세의 지지와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마소 1세는 이 위대한 [[카파도키아]] [[교회박사]]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멜레티우스 이교]] 문제에 있어서 다마소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및 그의 후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2세|페트로스 2세]]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바울리누스|바울리누스]]를 지지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니케아에서 고백한 정통 신앙을 진실되게 따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레티우스가 선종하자 다마소 1세는 후임 주교를 물색하였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의 플라비아누스 1세|플라비아누스]]는 후보 명단에서 제외하였다.<ref>[[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 《Historia Ecclesiastica》 5.15</ref>
 
다마소 1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2세 주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공격을 피해 로마로 피신하였다. 페트로스 2세는 자신의 망명을 받아 준 다마소 1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다마소 1세는 페트로스 2세를 환대하며 그를 영접하였다. 그는 페트로스 2세에 동조하여,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맞서 그를 지지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