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Xakyntos/201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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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시작입니까? ==
 
가짜라는 것은 없는 얘기를 하는 거겠지요.. [[삼국유사]]의 기록상을 언급하면서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 추정하여 B.C 2333 ~ B.C 238라는 년도를 제시했을 뿐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병존했던 사실을 기록해 주었기 때문이지요..왜 곳곳마다 사관이 다른다는 이유로 삭제해야 되지요? 현재도 정확한 기록도 남기지 않는데 당시의 기록이 정확하게 명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용자:Lexus|진실탐구]] ([[사용자토론:Lexus|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2:10 (KST)
 
{{인용문|황룡국은 지금의 평안도 용강(龍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려 때 용강성 또는 군악(軍岳)으로도 불렸다.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조차 의주로 보기도 하였다. 용강이 고구려 옛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국내성이 좀더 북쪽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옛 서울은 [[국내성]]보다 남쪽, 성천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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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은 [[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경주]] 사량부의 사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면서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는 6촌(六村)이 있었다'''고 전하였지요..위와같이 기록에도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사용자:Lexus|진실탐구]] ([[사용자토론:Lexus|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2:34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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