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RedMosQ (토론 | 기여)
잔글 Seoul1945(토론)의 편집을 RedMosQ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Lexus (토론 | 기여)
잔글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최치원'''(崔致遠, [[857년]]~?)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이 《[[삼국사기]]》를 통해 남아 있다. 특히 8l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단군]]의 가르침을 [[단군]]의 신하 신지(神志)가 전서체로 비석에 새겨 전해오던 것을 최치원이 이를 한자로 번역하여 태백산([[묘향산]]) 꼭대기의 바위에 새긴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ref name="고운최치원">『국역 고운선생문집』 상·하(고운선생문집편찬회, 1972·1973),『최문창후전집』(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72),「최치원의 역사서술」(조인성,『역사학보』94·95, 1982),「고운 최치원의 사회개혁사상」(최근영,『한국사상』18, 1981),「최고운의 사상과 문학」(양광석,『한국문학론』, 일월서각, 1981),「최치원연구」(최경숙,『부산사학』5, 1981),「고운 최치원의 사상연구」(김복순,『사총』24, 1980) 참조</ref>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이 《[[삼국사기]]》를 통해 남아 있다. {{출처|우리말 고문으로 된 [[천부경]] 한문 번역본을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ref>{{서적 인용|저자=유동식|제목=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페이지=64/376|꺾쇠표= 예|연도=1997|출판사=연세대학교출판부|ISBN=9788971414231}}</ref>
 
== 생애 ==
줄 31 ⟶ 32:
[[884년]] [[음력 10월]] 귀국했다.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太山 : 지금의 전북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ref name="고운최치원"/>
 
== 전해오는 이야기 ==
매월당 [[김시습]]은 [[신라]] [[내물왕]](17대) ∼ [[눌지왕]](19대) 때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쓴 부도지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징심록(澄心錄)' 15지(誌)와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선생이 보탠 '금척지(金尺誌)'와 김시습이 보탠 '징심록추기' 등 총 17지(책)를 전하고 있는데 부도지는 징심록의 제1지에 있다고 전해진다.<ref name="고운최치원"/><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11/06/27/20110627004036.html|제목=한국차의 신화학 다시쓰기, 매월당 초암차 일본으로 건너가|성=|이름=박정진 문화평론가|작성일자=2011-06-27|출판사=세계일보|확인일자=2013-08-25}}</ref>
 
== 최치원과 해운대, 양저우 시 ==
최치원은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하여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도 동백섬 절벽 한켠에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으며, 해운대구와 최치원이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을 지었던 양저우시구는 자매결연을 맺게 됐다.<ref name="고운최치원"/>
 
== 저서 ==
줄 51 ⟶ 55:
== 같이 보기 ==
* [[고운국제교류사업회]]
 
== 주석 ==
<references/>
 
== 참고문헌 ==
줄 57 ⟶ 64:
*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koreanhistory/2230 네이버 캐스트 - 최치원]
 
{{토막글|한국 사람}}
{{틀:1996년-이 달의 문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