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 학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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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에서는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는 3,000명을 처형당하는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마을 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됐다. 학살 주체는 [[육군특무대]](CIC)와 [[헌병]]이었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은 그 피해정도가 심각했는데,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ref>광복 이후부터 군정기 기간 동안 경상도지역은 공산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특히,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만큼 공산주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ref><ref>경상도 말에 "골로 간다(죽는다)"는 표현이 보도연맹 학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 현재에도 경상도 지역에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유족들이 굉장히 많다.</ref> 보도연맹 학살은 [[조선인민군]] 점령 지역에서 일어난 [[좌익]] 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6.25 전쟁 와중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이승만]]은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 많은 사람이 살해된 상태였다. 이렇게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얼마나·어디서·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오늘날 현재에도 추측만 할뿐,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인(헌병)과 경찰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었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이 진행된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레드 컴플렉스|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철저히 은폐됐고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어왔다. 따라서 [[6.25전쟁]]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 많게는 50~100여만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없다.<ref name=autogenerated3>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0쪽</ref>
 
==사건 진상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