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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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李适—亂)은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고,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까지무고를 당하자 [[이괄]]이 일으킨난을 반란으로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는데,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한다하다. 그러나 후에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함으로써패배하여 진압되었다.
 
== 개요배경 ==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인조|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 (17세기)|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조선)|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 (17세기)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이괄]](李适, [[1587년]]~[[1624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백규, 병조참판 이육의 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1623년]] 음력 3월에 [[인조반정]]이 일으났을 때 큰 공을 세운다.
 
== 원인 ==
이괄의 난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인조|인조]]를 즉위시켰는데, 이때 [[이괄]]이 2등공신에 책봉되었고 게다가 이괄은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
 
그런데 [[1624년]] 음력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 (17세기) |이전]], [[한명련]], [[정충신]],[[기자헌]], [[현집]], [[이시언 (조선)|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 (17세기)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과정==
=== 반란 발생 ===
[[이괄]]은이괄은 [[기익헌]], [[한명련]] 등과 함께 압송하려 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년]] [[음력 1월 22일]] 항왜병 100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조선 인조|인조]]는인조는 [[김유 (1571년)|김유]]의 말을 들어 [[기자헌]], [[김원량]] 등 40명의 연루자들을 처형시켰다.
 
이괄은 황주신교에서 [[정충신]]과 [[남이흥]]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탄에서 다시 부도제찰사 [[이시발]]이 이끄는 관군을 격파하고 황해도방어사 [[이중로]]와 우방어사 [[이성부 (1583년)|이성부]]를 전사시켰다.
 
이괄군이 [[개성]]을 지나 2월 8일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인조|인조]]는인조는 그날 밤 서울을 버리고 [[수원]]에 도착하였다. [[천안]]에서 반란군의 평정 소식을 접하였으나 패주하는 반란군이 [[이천시|이천]] 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12일 새벽 [[공주시|공주]]로 피란을 갔다.
 
[[음력 2월 11일]] 이괄군은 [[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서 [[조선 선조|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조선 중기)|흥안군 제]](興安君 瑅)를 왕으로 세웠다. 인조는 6일 동안 공주에서 난을 피해 있어야 했고 한편 [[이괄]]은이괄은 포로가 된 [[풍천]] 부사 [[박영신 (조선의 무신)|박영신]]이 끝내 협력하지 않자 그를 참살해버렸다참살했다.
 
== 반란= 진압 ===
이괄은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괄은 [[음력 2월 11일]]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장만]]과 [[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를, 군대를 둘로 나누어 포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수구문]]을 나와 [[광주시|광주]]로 향하다가 [[장만]], [[정충신]], [[남이흥]] 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괄의 군사에 의해 [[정철|송강 정철]]의 사위이자 [[광주광역시|광주]] 목사인 [[임회]]가 살해당했다.
 
도망가던 이괄은 [[음력 2월 15일]] [[이천시|이천]]에서 아들 [[이전 (17세기)|이전]], 부하 [[한명련]]과한명련과 함께 부하 [[기익헌]], [[이수백]]에게 살해되면서살해되었다. 이로써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반란군에 투항했던 [[이흥립]]은 자결했으며 이괄이 왕으로 세운 [[흥안군 (조선또한 중기)|흥안군]]은왕자의 조선의 왕자임에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국문도 없이 간신배 [[심기원]]이 자기 마음대로의해 처형해버렸다처형당했다. 하지만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로 들어가 이후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ref>《인조실록》, 10권,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pa_10309001_001&pId=kpa_10309001_001 비변사에서 강홍립 등에 대한 조처를 건의하다], 1625년 9월 1일</ref>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