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더글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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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 탄압받는 노동자들과의 만남 ===
더글러스는 [[1904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폴커크 주]]에서 태어났다. [[1910년]] 그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이민하여 [[매니토바 주]]의 [[위니펙]]에 정착하였다. 어렸을 때 그는 다리를 다쳤고 [[골수염]]에 걸렸지만 그의 병을 연구과제로 삼고 싶어하는 의사 덕분에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더글러스가 누구나 치료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공공의료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때에 그의 가족들은 [[글래스고]]로 돌아갔다가 [[1919년]]에 다시 위니펙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위니펙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목격했는데 경찰들이 파업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몽둥이와 총으로 진압하고, 심지어는 경찰이 2명을 죽이는 국가폭력을 목격하였다.
 
=== 대학교 졸업이후 ===
더글러스는 [[1924년]]에 [[:en:Brandon College|브랜든 대학]]에 입학했으며 여기서 사회 복음주의(Social Gospel)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 여름 브랜든 대학을 졸업하고 [[1933년]]에는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졸업논문은 [[우생학]]적 관점에서 본 "저능아 가정의 문제"였다. 그는 여기서 해법의 하나로 이들을 불임시키고 지체부자유 장애인들과 함께 캠프를 만들어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독일을 방문하고 난후 이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사실 그는 이후 생애에서 이 논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의 정부는 어떠한 우생학적인 정책을 추진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