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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08-05}}
[[파일:WeiZheng.jpg|thumb|위징]]
'''위징'''(魏徵, [[580년]] - [[643년]])은 중국 [[당나라|당]]
== 생애 ==
거록(巨鹿) 곡양(曲陽) 사람으로<ref>곡양은 지금의 중국 [[하북 성]] 진현(晋縣)인데, 이미 당대의 문헌으로 오긍의 《정관정요》에 "위징은 거록 사람인데 근래에 상주의 내황으로 집을 옮겼다(魏徵,钜鹿人也。近徙家相州之內黄)"고 했고, 구양순(毆陽洵)이 지은 『당경조개원사종명(唐京兆開元寺鐘銘)』에도 "비서감(秘書監) 검교시중(檢校侍中)인 거록군(钜鹿郡) 위징이 찬(撰)한다"고 했으며, 두엄(杜淹)이 지은 《문중자세가(文中子世家)》에도 당시 이름높던 문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거록의 위징"을 언급하는 등 위징의 고향을 거록으로 명기하고 있다. [[오대 십국]] 시대에 편찬된 《구당서》 위징열전에서는 이 설을 따라서 거록 곡성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주의 대상경자에서 태어났다(生于周大象庚子)"라고 적었다.</ref>, 대중(大中) 6년([[852년]]) 11월에 세워진 『위공선묘비』(魏公先墓碑)
어려서 집이 가난하였고, [[수나라|수]]
당시 이세민의 인기와 권력을 불안히 여긴 태자 이건성에게 위징은 이세민을 독살하여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뒤에 비서감(秘書監), 시중(侍中)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쳤으며, 태종에게 2백 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다. 《[[자치통감]]》
{{인용문|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서 의관을 바로잡고, 옛 것을 거울로 삼아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음으로서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
태종은 위징이 죽기 직전, 그의 장남 숙옥(叔玉)에게 딸 형산공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생전에 위징이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사관(史官) [[저수량
이후 정관 18년([[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태종의 명으로 편찬하게 한 《[[수서
== 자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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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기 속의 위징 ==
[[명나라|명대]]
== 위징을 연기한 배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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