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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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해전|사천]], [[당포 해전|당포]], [[당항포 해전|당항포]], [[율포 해전|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은 일본 육군에 계속 패전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8월 12일([[음력 7월 6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49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였다.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렀고, 이곳에 정박하였다. 이때 [[일본]] 함대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였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