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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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 외에도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 풍습인 [[천인침]]을 소재로 한 〈천인침(千人針)〉을 출품해 특선을 차지하는 등 친일 작품을 제작했고, [[대화숙]]에서 미술을 지도한 경력 등 친일 행적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이로 인해 광복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될 때 배제되기도 했다.
 
윤호중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를 지내며 [[대한민국]] 조각계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고, [[1955년]]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현명(弦鳴)〉(1942), 〈물동이를 인 여인〉(1944) 등 토속적인 소재의 인물 조각이 대표작이다. 그러나 광복 후에는 미술교육과 행정 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으며, [[제1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동상을 비롯하여 제작하는 등 기념탑 등 대형 조각 작품 제작에 자주 참여했다. 현실타협적인 이러한 경력은 [[김경승]]과 유사하다. 윤효중이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제작한 이승만 동상은 [[4·19 혁명]] 때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파괴된 바 있다.<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