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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투쟁==
캔자스 유혈 폭력 사태의 [[게릴라전]]에 이어서 캔자스를 통치하게 된 헌법에 대한 투쟁이 있었다. 미주리 주민들에 의한 미등록 투표로 구성된 비합법적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자유 주 그림자 정부를 만들었던 [[1855년]] [[토피카 헌법]]을 포함한 여러 가지 헌법 초안이 기초되었다.
 
[[1857년]] 캔자스 헌법 제정 회의가 소집되었고, 여기에서 노예제를 옹호하는 ‘[[레컴프턴 헌법]]’으로 알려진 헌법 초안을 기초했다. 그것은 노예 제도 반대자에게는 투표를 실시하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은 비준 투표를 보이콧했다. 레컴프턴 헌법은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에 의해 수용되었고, 뷰캐넌은 의회에 그 헌법의 수락과 주 성립을 촉구했지만, 의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재선거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재선거는 노예제 지지자들이 보이콧하였고,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은 헌법 안을 거부함으로써 승리를 선언했다. 결국 레컴프턴 헌법은 그것이 주민 과반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건이 폐지되었다.
 
[[1859년]] 중반 [[와이앤도트 헌법]]이 기초되었다. 이 헌법 초안은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견해가 담겼다. 유권자 투표에서는 2대 1의 비율로 승인되어, [[1861년]] [[1월 29일]] 캔자스는 그 조건에 자유 주로서 미합중국에 가맹되었다.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