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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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나는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다. 그들은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분명하게 말해왔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바티스타의 하수인으로 의심받는 자들과 경찰, 병사들이 살인, 고문 같은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로 인민 재판정에 섰다. 정치범죄 혁명 재판소에서 대부분의 죄수들은 총살되었고, 나머지는 장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마이애미 반체제 인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 재판의 악명 높은 사례가 하나 있는데, 산티아고에서 생포된 바티스타 정권의 병사 포로 70명을 라울 카스트로의 명령으로 모두 처형되었다고 하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는 라 카바냐 요새의 최고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피델 카스트로가 反혁명을 꾀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정적들과 바티스타에 충성하는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처벌 없이 경찰이나 군대에서 쫓겨나서 목숨을 부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정권의구 정권의 몇몇 고위급 인사들은 해외 군무관으로 추방되었다.
 
[[1961년]] [[피그스 만 침공]] 이후 새 쿠바 정부는 [[로마 가톨릭교회]] 등 종교 단체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하며 주교를 비롯한 수백명의 성직자들을 나라에서 쫓아냈다. 파리아는 쿠바 정부의 무신론 입장으로 사립 학교는 금지되고 점차 사회주의 국가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썼다. 벽촌에까지 학교가 세워져 모든 인민이 9학년까지 양질의 무상교육 서비스를 보장받게 되었다. 의료 부문 역시 국유화되어 학교와 마찬가지로 벽촌에까지 의료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모든 인민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받게 되었다. <ref>{{서적 인용 |제목 =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세계적 의료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 |저자 = 요시다 다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