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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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가신리 홍골에서 태어났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으로, 홍이상의 차남 독정재(獨靜齋) 홍립(洪雨+立)의 11대손이다. 그의 7대조 천일재 [[홍중현]](天一齋 洪重鉉)이 [[충주군]] [[노은면]]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숙종]] 때의 당쟁에 염증을 느껴 조선 팔도를 유람하던 홍중현은 충주군의 노은면에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된다.
 
어려서 외가인 오갑 신씨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 [[민응식]]의 집에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다시 [[충주]]로 피신왔다. 이때 가산리 근처에 은신하게 되었다. 홍승대의 학문과 인물됨을 본 명성황후는 "선생같은 인물이 어찌 벼슬도 하지 않고 이런 시골에서 지내느냐?"고 묻자 그는 "난세의 벼슬은 욕이옵나이다." 하였고,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의 확산으로 임시 행궁을 짓게 되자 도우라는 명을 받들어 충주에서 공주 일대를 순행하며 임시궁궐 건립 기금을 모금해 돌아왔다. 그러나 정세가 바뀌어 명성황후께서 갑자기 상경하자 그는 "탐관오리의 돈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 하고 여러 고을 선비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여시는데여는데 쓰시었을썼을 뿐 한 푼도 사적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종, 노비들을 면천시켜 주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구한 말 의병들은 독립운동을 한다 하였으나 행진할 때 소녀 아이들이 길에 나서면 행군길을 가로질렀다 하여 함부로 총을 쏘아 죽이고 횡포를 부렸다. 그러자 홍승대는 나서서 어린 목숨을 죽여 무엇하느냐, 그냥 내 옷을 벗겨 걸고 거기다 쏘라고 하자 의병들이 기세에 눌려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 충주 고을에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다. [[1910년]] [[충주군]]민들의 천거로 [[노은면]] 면장을 맡으시었으나 왜놈들 심부름이라 하여 이듬해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