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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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약산.jpg
|그림제목= 1940년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출생일=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출생지= {{국기나라|한국|제국|이름=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시|밀양읍]] 내이리 901번지
|사망지=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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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 [[1958년]] [[11월]]?)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혁명가·정치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948년]] [[4월]] 월북 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으나 실력의 한계를 느껴 이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후 [[중국 국민당|국민당]] 장교 신분으로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국민혁명([[북벌 (국민당)|북벌]])에 가담했다. 이후 군사 양성을 위해 남경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을 추진했고,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했다. [[1935년]] [[김규식 (1881년)|김규식]](金奎植) 등과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을 창당 활동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통합 요구에 부응, 1940년대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해방 후,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김규식 (1881년)|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귀환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여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 국가검열성상에 임명된 뒤 노동상, 다시 국가검열성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11월]] 연안파 숙청작업 때 숙청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