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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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즉위 초 진사왕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을 방비하는데 힘썼으며 [[389년]]과 [[390년]]에는 [[고구려]]를 선제공격하여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가 도압성(都押城)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391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과 산을 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낭비하였으며, 이로 인해 말갈과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다. [[392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만 병력으로 내습하여 [[한수]](漢水) 이북의 석현성 등 10여 개 성과 수많은 부락이 함락되었다. 또한 10월에는 북방의 중요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당했다.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이 침입에 대응하지 않았으며, 11월에는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다가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제14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침류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했다고 하며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진사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346년]]~[[375년]] 재위 말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공격으로 긴장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즉위 직후인 [[386년]]에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關防)을 쌓았다. [[389년]]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고 [[390년]]에는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를 시켜 [[고구려]]의 도곤성(都坤城)을 함락하게 해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부터 [[백제]]는 수세에 몰렸다. [[391년]] 7월 [[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의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군사작전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맞서 싸우지 못했다. 10월에는 험준한 요새지인 [[관미성]](關彌城)마저도 함락당했다. 진사왕은 그해 구원(狗原)에 사냥을 나갔다가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그러나 니혼쇼키에는 진사왕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어 정치세력간의 갈등으로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 자연재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