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젤라시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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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관점에서 볼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분열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는 오직 신성(神性)만이 있었을 뿐, 인성(人性)은 없었다는 주장([[단성설]])은 [[이단]]적인 주장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젤라시오 1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 안의 두 가지 본성(De duabus in Christo naturis)》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젤라시오 1세의 서한과 논문들은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특히 서방 교회들의 규정들을 묶은 서한집과 칙령집이 유명하여 이 시대를 ‘젤라시오 르네상스’라고도 일컫는다. 오늘날 젤라시오 1세의 보수적인 라틴어 문체는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의 문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ref name="Ullman"/>
 
아카키우스 분열 기간 동안에 젤라시오 1세는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사도 베드로]]를 계승한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워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를 아우르는 전체 교회는 교황의 통치를 받는다는 [[교황 지상]]을 주장하여 후임 교황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494년 젤라시오 1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에게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두 권력]](Duo sunt)》이라고 알려진 서한을 써서 보냈다. 이 서한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속성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ref name = "Fordham">[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gelasius1.html Medieval Sourcebook: Gelasius I on Spiritual and Temporal Power<!-- Bot generated title -->]</ref>
 
==이교 의식 금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대한 젤라시오 1세의 유연한 태도는 오히려 [[오도아케르]]에 이어 [[이탈리아]]의 [[왕]]이 된 [[아리우스파]]인 [[테오도릭 대왕]]과 좋은 관계를 맺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