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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대표적 유학자 집안
 
송하진 시장의 아버지 강암 송성용 평생을 유학, 한문학, 서예가에 정진한 강직한 성품을 가진 호남의 대표적 학자이다. 전주시 호남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호남제일문>의 현판을 작성한 것이 강암 송성용 선생이다.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로 죽기 직전까지 보발과 한복을 지키며 살았는데, 사람들이 "시대가 달라졌는데 왜 불편하게 사느냐"는 질문에 늘 "나를 평생 지켜준게 갓과 상투요"라고 답하며 일제의 단발령에 항거했던 선친의 정신을 이으며 선비로서의 평생을 보냈다.
강암선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6년 선친이 타계하면서 부터다. 이전부터 전북 일대에서 서예가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었음에도 어떤 공적인 모임도 사양하며 스스로 "시골구석에서 자라 견문이 좁아 글자나 몇 자 쓰는 수준이다."라고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전국에 명성이 알려졌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56년 주변 권고에 못 이겨 행서와 화죽 2점을 서예대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70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며 중앙무대를 밟게 되었다시작했다.
강암선생의 작품은 호남을 비롯한 경향각지에 비문 현판 등 수천여점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호남제일문]]. 내장산내장사. 토함산석굴암. 두륜산대둔사. 불국사자하문. 불국사불국선원.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 연지문. 금산사보제루. 백양사화엄전. 화엄사적멸당. 금오산향일암.동춘송선생유허비.신도비 등의 대필은 강암선생의 웅혼한 기상을 그대로 말해준고 있다.
강암의 자식들은 그가 강조하던 '대인춘풍 지기추상',처럼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하게, 타인에게는 봄 바람 처럼 훈훈하라는 교육 덕분인지 장남은 관선 전주시장을 지낸 송하철, 2남은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을 지낸 송하경, 3남은 고려대 문과대학을 지낸 송하춘, 4남 송하진이송하진은 현재 전주시장이다.
강암은 1999년 생을 마감하며 서예관 부지와 함께 작품 등 그때당시 17억 상당의 재산을 전주시에 기부하였다. 현재 그의 정신사와 뜻을 후세에 이어가고자 강암서예 학술재단이 운영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