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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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2세의 이러한 유화적 태도에 많은 주교와 사제들이 격분하였으며, 로마는 순식간에 [[단성설]]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양측간에 적대감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ref name=Morehead/> 날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많은 로마 시민이 포티누스에게 영성체를 허락해주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아나스타시오 2세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되 그가 주는 영성체는 거부하는 집단 시위까지 하였다.<ref name=McBrien />
 
==죽음과 사후 영향력 및 평가==
그는 [[아카키우스]]가 주례한 세례와 서품을 승인하려는 양보의 자세를 취했으나 아카키우스의 이름만은 목록에서 제거하게 하였다. [[테오도릭 대왕]]이 동방에 보낸 [[원로원]] 의원 파우스투스에 의해 타협을 보게 되었다. 그 의원은 [[황제]]로 하여금 아나스타시오 2세가 헤노티콘을 받아들인다고 믿게 하였다. 아나스타시오 2세의 융화적인 노력은 아카키우스의 지지자였던 [[테살로니키]]의 [[대주교]]가 [[로마]] [[교회]]에서 파견한 [[부제 (기독교)|부제]] 포티누스를 영접함으로 드러났으나 로마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과 마찰이 생겨 로마 교회와의 친교는 거절되었다. 아나스타시오 2세는 그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선종하였다. 아나스타시오 2세는 생전에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창조론의 오류인 영혼 전승설을 단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