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심마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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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드===
라벤나의 베드로 2세와 밀라노의 라우렌시오, 아퀼레이아의 마르첼리아노 등 이탈리아 주교들에 의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시노드가 소집되었다.
재위 중 소위 라우렌시오 분열이 일어났다. 심마코는 [[라벤나]]에 소환되어 테오도릭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함정인 줄을 알고는 피해 버렸다. 심마코의 도주는 테오도릭를 분노케 하였다. 그리하여 테오도릭은 알티눔의 주교 페트루스를 로마 교회의 관찰사로 임명하여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게 하였다. 심마코가 [[이탈리아]] 주교회의에 참여하기로 동의하자 테오도릭은 로마에서 심마코를 재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종교회의도 교황을 재판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마코가 회의장으로 가는 동안 심마코의 지지자들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을 길에서 만나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일부 성직자들이 죽는 사태도 일어났다. 심마코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회의가 속개되어 팔마나무 회의로 알려져 있는 제4회기에서 교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판받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심마코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되어 교회의 재산 관리권을 가지게 되었다. 테오도릭은 라우렌시오가 교황이 되도록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 후 로마는 4년간 언쟁과 소란의 연속이었고 거의 모든 교회의 소유권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양측은 유인물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부제 디오스코루스가 테오도릭과 중재를 벌여 로마의 평화를 회복시키자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교회의 재산권을 심마코에게 넘겨주고 점차적으로 심마코에게로 돌아갔다.
 
재위 중 소위 라우렌시오 분열이 일어났다. 심마코는 [[라벤나]]에 소환되어 테오도릭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함정인 줄을 알고는 피해 버렸다. 심마코의 도주는 테오도릭를 분노케 하였다. 그리하여 테오도릭은 알티눔의 주교 페트루스를 로마 교회의 관찰사로 임명하여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게 하였다. 심마코가 [[이탈리아]] 주교회의에 참여하기로 동의하자 테오도릭은 로마에서 심마코를 재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종교회의도 교황을 재판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마코가 회의장으로 가는 동안 심마코의 지지자들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을 길에서 만나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일부 성직자들이 죽는 사태도 일어났다. 심마코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회의가 속개되어 팔마나무 회의로 알려져 있는 제4회기에서 교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판받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심마코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되어 교회의 재산 관리권을 가지게 되었다. 테오도릭은 라우렌시오가 교황이 되도록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 후 로마는 4년간 언쟁과 소란의 연속이었고 거의 모든 교회의 소유권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양측은 유인물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부제 디오스코루스가 테오도릭과 중재를 벌여 로마의 평화를 회복시키자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교회의 재산권을 심마코에게 넘겨주고 점차적으로 심마코에게로 돌아갔다.
 
심마코는 라우렌시오 분열을 계기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서한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보냈으나 아카치우스 분열을 종식시키지는 못하였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심마코의 도움이 필요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서 논쟁 중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리클레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그 서신은 심마코의 후임자가 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