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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에서 [[원세형]](元世亨)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아버지 [[1895년원세형]] 관비유학생으로[[선공감]][[감역]] 뽑혀등의 도일했다.관직을 역임하면서 [[도쿄한성부]]로 이주, [[게이오의숙한성부]] 보통과와서서 창동으로 이주했다가 [[도쿄 법학원한성부]] 법과에서북서면 수학하며대안동 신학문을42통 배우고,4호로 부기를본적을 공부했다옮겼다. 세무관리국과충청북도 참여관을 지낸 [[일본은행원은상]]에서, 실무견습을중추원 거친참의를 지낸 [[1899년원덕상]], 귀국했다군수를 지낸 [[원훈상]] 등은 모두 그의 동생들이었다.
 
[[1895년]] [[9월]]에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뽑혀 도일했다.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와 [[도쿄 법학원]] 법과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배우고, 부기를 공부했다. 세무관리국과 [[일본은행]]에서 실무견습을 거친 뒤 [[1899년]]에 귀국했다.
 
[[1902년]]부터 [[탁지부]]와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다. [[1935년]]에 출간된 《조선공로자명감》<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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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에는 이상을 꺾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관직을 버린 것으로 적혀 있다.
 
[[1903년]]에 다시 외부 번역관으로 관직에 오른 뒤, [[의정부]]를 거쳐 [[1907년]]에는 탁지부 사세국장과 수도국장을 지냈다. [[1905년]] [[12월 26일]]에는 경상북도 암행 시찰을 다녀와, [[대구부]]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본인을 적발하여 처벌할 것을 상주하였다.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일자=2008-11-18 |형식= |작품명=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품계는 종2품이었다. 이 기간 중 [[보성전문학교]]의 [[경제학]] 강사를 맡았으며, 《재정학》, 《경제학》과 같은 경제학 교재도 집필하여 서구 경제학을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일 병합으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한 뒤 곧바로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발탁되었다. [[1918년]]에는 [[강원도]] 지사, [[1921년]]에는 전라남도 지사로 승진하였다. 원응상이 전남지사를 맡고 있을 때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하여 이 사건의 주무 관료였다.<ref>{{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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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67,237,319쪽
|꺾쇠표=예
}}</ref> [[1938년]]에 [[중일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방공협회]]가 창립되자 경기도지부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맡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전라남도지사]] 고문을 맡았다가 임시로 부지사를 맡아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였을 때 80대의 고령으로 생존해 있었다.<ref>{{서적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