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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869년]] [[8월 20일]]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 중리에서 [[원세형]](元世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고려]] 중기에 우시랑을 지낸 시중공 원익겸의 24대 손이었다.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에서 [[원세형]](元世亨)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아버지 [[원세형]]이 [[선공감]][[감역]] 등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한성부]]로 이주, [[한성부]] 서서 창동으로 이주했다가 [[한성부]] 북서면 대안동 42통 4호로 본적을 옮겼다. 충청북도 참여관을 지낸 [[원은상]], 중추원 참의를 지낸 [[원덕상]], 군수를 지낸 [[원훈상]] 등은 모두 그의 동생들이었다.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에서 [[원세형]](元世亨)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아버지 [[원세형]]이 [[선공감]][[감역]] 등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한성부]]로 이주, [[한성부]] 서서 창동으로 이주했다가 [[한성부]] 북서면 대안동 42통 4호로 본적을 옮겼다. 충청북도 참여관을 지낸 [[원은상]], 중추원 참의를 지낸 [[원덕상]], 군수를 지낸 [[원훈상]] 등은 모두 그의 동생들이었다.
[[1895년]] [[9월]]에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뽑혀 도일했다.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와 [[도쿄 법학원]] 법과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배우고, 부기를 공부했다. 세무관리국과 [[일본은행]]에서 실무견습을 거친 뒤 [[1899년]]에 귀국했다.
 
[[1895년]] [[9월]]에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뽑혀 도일했다.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와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의숙]] 이재과로 진학하여 세무관리국사무, 일본은행 사무, 각종 부기학 등을 수학했다. 게이오 의훅 졸업 후 [[일본 대장성]] 견습생활을 하며 야간반으로 [[도쿄 법학원]] 법과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법학을 배우고, 부기를제도를 공부했다. 세무관리국과 [[일본은행]]에서 실무견습을 거친 뒤 [[1899년]] [[7월]]에 귀국했다.
 
[[1902년]]부터 [[탁지부]]와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다. [[1935년]]에 출간된 《조선공로자명감》<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