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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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양의 명당입지 명명백백.png|섬네일|300px|한양의 명당 입지]]
 
'''풍수'''(風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람]]’과 ‘[[물]]’이라는 뜻으로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동아시아]]의 고유 사상이다.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실제로 [[조경]]과 [[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이다.<ref name="풍수학">{{서적풍수라는 인용|저자=최창조|제목=최창조의말은 새로운바람을 풍수막고 이론|꺾쇠표=물을 얻는다는 뜻인 [[장풍득수|연도=2009장풍 득수]](藏風 得水)를 줄인 말로, 생명을 불어 넣는 지기(地氣:땅 기운)을 살피는 것이다.11 자연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물로 생명체를 이루고 있다.27|출판사=민음사|ISBN=9788937426735}}</ref>
 
바람과 물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지리적인 조건에 맞춰 해석하는데 산세(山勢), 지세(地勢), 수세(水勢) 즉 산의 모양과 기, 땅의 모양과 기, 물의 흐름과 기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켰고 이것에 의해서 생활하는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풍수이다.<ref name="풍수학">{{서적 인용|저자=최창조|제목=최창조의 새로운 풍수 이론|꺾쇠표= 예|연도=2009.11.27|출판사=민음사|ISBN=9788937426735}}</ref>
 
풍수 사상은 중국 [[전국 시대]] 말기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한국]]에는 삼국 시대 이전에 전래되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는 주로 [[묘지]] 풍수나 [[주택]] 풍수, [[명당]]과 같은 터 잡기로 생각하기도 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최창조 교수([[지리학]])가 ‘자생풍수’(自生風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접근을 모색하면서 장례문화를 비롯하여 생태계에 의한 환경과 건축같은 학문적인 방법의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분석하고 있는 풍수는 미개한 토속신앙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가징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풍수에 좌향등을 정하는 데 사용하는 패쳘에서 내반 중반 외반의 삼반이 존재하는데 그 중 외반은 물의 방향으로 측정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외반의 방향은 지구 자전 운동에 따른 각가속에 의한 관성을 보정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7.5도 편서되게 방향을 보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수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산수, 좌향,운기 등으로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판단된다. 첫번째 산수는 산과 물의 주어진 형상에 대한 분류이다. 이렇게 주어진 산수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진후에 좌향을 결정하여 그 산수와 좌향의 조합에 따른 기운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산수와 좌향에 대한 기운이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나타나는 운기에 의하여 기운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가 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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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는 산천(山川)·수로(水流)의 모양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사상으로, 이것을 체계화한 학설이 '''풍수설''' 또는 '''풍수지리설'''이다. 근대 지리학이 들어오기 전에는 '''지리설'''로도 불렸다.
 
이러한 풍우(風雨) 등의 자연 현상의 변화가 인간 생활의 화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중국]]의 [[전국 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됐으나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서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의 예언설을 만들어내고(음양지리(陰陽地理) 및 풍수도참(風水圖讖)), 그것은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다시 교리로 체계화되었다. 이 설은 그러한 사상으로서, 이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f name="풍수학"/>
 
== 주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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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풍수 ==
[[한국]]에는 이 설이 신라 시대에 전래되었으며 우리[[한국]] 전통의 [[대지모 사상]]과 중국의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신라]] 말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대가가 나왔다. 그는 대개 중국에서[[중국]]에서 기원하여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지리소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하였다.
 
곧 지리(地理)는 곳에 따라 쇠왕이 있고 순역이 있으므로, 왕처(旺處)·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처(衰處)·역처(逆處)를 인위적으로 비보(裨補 : 도와서 더하는 것)할 것을 말하여, 일종의 비기도참서(秘記圖讖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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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開京 : [[개성특급시|개성]])도 풍수상에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 궁예전(弓裔傳), 《[[고려사]]》 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고 있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 많고 내기불예(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첩첩이 둘러 있어서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 들어서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보하기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웠다.
 
이상에서 대강 보아 온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은 왕가(王家)에서는 물론 민간에게도 신앙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날도 《[[정감록]]》(鄭鑑綠)을 믿고, 한때 [[계룡산]](鷄龍山)이 서울이 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직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니 하여 산소(山所)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ref name="풍수학"/>
 
== 미신으로서의 풍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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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기 ==
* [[도선]]
* [[장풍득수]]
* [[명당보국]]
* [[배산임수]]
* [[동기감응론]]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