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펠라지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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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지오는 [[부제 (기독교)|부제]]로 서품되어 [[교황 아가피토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갈 때 동행하였으며, 그곳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다.[http://www.newadvent.org/cathen/11602a.htm] 아가피토 1세는 펠라지오를 교황 대사로 임명한 뒤,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선종하였다. 537년 3월 펠라지오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사이 아가피토 1세의 뒤를 이은 [[교황 실베리오]]가 물러나고 부제였던 [[교황 비질리오|비질리오]]가 교황이 되었다.
 
교황 비질리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을 때에는 펠라지오가 로마에 남아서 교회를 돌보는 등 교황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때, [[고트족]]의 왕 [[토틸라]]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봉쇄하였다. 펠라지오 1세는 기근에 시달리는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으며, 토틸라와 담판을 지어 공격을 멈추려고 하였다.
 
펠라지오 1세는 국가 공무원의 아들로서 로마 교회의 [[부제 (기독교)|부제]]였으며 교황이 되기 전에 [[교황 아가피토 1세]]를 수행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간 적이 있었다. [[545년]] [[교황 비질리오]]가 감금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될 때 펠라지오는 로마에 남아 교회를 돌보았다. [[토틸라]]의 침입을 받아 로마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토틸라와 담판을 지어 로마인들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하였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삼장서를 단죄하는 데 찬동하였다. [[551년]] 12월 23일 토틸라에 의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협상하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거기서 교황 비질리오의 일행과 합류하여 비질리오가 두 번째로 피신할 때 칼케돈의 유페미아 성당에 함께 있었다. 비질리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그를 보좌하였다. [[555년]] 12월 23일 비질리오가 시라쿠사에서 선종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협약한 후 풀려나 새 교황이 되어 로마로 돌아갔다. 이는 [[서유럽]] 교회의 수치로 여겨진다. 교황의 부재 중에 로마 교회를 돌보던 마레아스 [[신부 (기독교)|신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장군 [[나르세스]]가 펠라지오 1세를 교황좌에 오르게 하였으나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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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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