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몬드 프렌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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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치타워 경력 ==
프렌즈는 1922년 출생하였다. 그의 삼촌인 프레드릭 프렌즈는 이 종교의 발전과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4대 협회장이다.<ref>{{harvnb|Rogerson|1969|p=66}}</ref> 그의 아버지는 성서 연구생 운동에 참여하였고(여호와의 증인 전신으로써 별도의 발전 역사를 가지고 있다.),1913년에 침례를 받았다. 레이몬드는 1938년에 여호와의 증인에 참여하였고, 1939년에 침례를 받았다.<ref>{{harvnb|Franz|2002|p=11}}</ref>
1944년에 프렌즈는 이 종교의 선교인 양성학교인 길르앗을 졸업하였고,[6] 일정기간 미국 순회구를 여행하는 감독자로써 지낸 이후에,1946년에 프에르토리코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프렌즈는 캐리비안 지부 대표가 되었고, 버진 아일랜드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순회하였다.1957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하였다.[7] 프렌즈는 37세에 신시아 자매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선교활동에 동참하였다. 둘은 모두 1961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4년을 더 활동한 후,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워치타워 본부로 전임되었다.[8]
프렌즈 조직의 집필부에서 일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 최초의 백과사전인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를 공동 집필하였다.1971년 그는 통치체 성원으로 임명되었다.[9]개인적 회고에서 프렌즈는 1979년에 내적 혼란을 겪었다고 말한다:
"나는 거의 40년 동안 조직의 모든 부서에서 대표자로 일하였다. 마지막 15년 동안 나는 세계 본부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그 중 마지막 9년은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 성원으로 일하였다. 이 마지막 기간은 나에게 혼란의 시간이었다. 환상이 현실에 직면하였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수도 있었다.(수혈거부, 병역거부, 선거와 투표 거부등거부 등) 그리고 실제로 죽었다. 통치체 성원들은 현실 감각을 상실한 채 보편타당하고 상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미신적이고 권위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목숨을 바치고 있었다.(말라위에서 단지 당원증 구입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들 수백 명이 화형과 강간과 살해를 당하였다. 동일한 시대에 멕시코에서는 뇌물을 주고 형제들이 병역을 면제받도록 협회가 편지를 보냈다.)"[10]
통치체 성원들의 독단적 교리화와 성경에 지나친 대한 확대해석을 보고 1979년에 프렌즈와 그의 아내는 세계 본부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