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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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llang|ka|თამარი}}, [[전자 (언어학)|번역]]: T'amar or Thamar 또는 타마라)([[1160년대|1160년경]] ~ [[1213년]] [[1월 18일]])는 [[조지아 (국가)|조지아]]의 [[바그라티오니 왕조]] 사람으로 1184년부터[[1184년]]부터 1123년까지[[1213년]]까지 조지아의 '''[[여왕]]'''을 지냈다. 타마르는 중세 조지아 군주국의 [[황금시대]]를 주재했다.<ref>Rapp (2003), p. 338.</ref> 그녀 자신의 권리에 의해 통치한 첫 번째 여왕으로서의 타마르의 지위는 중세 조지아의 문헌들에서 (여왕임에도) [[왕]]이라는 뜻의 ''메페''(''mep'e'')라는 칭호로 강조된다.<ref name=" Eastmond-109"/>
 
타마르는 1178년에 [[예상 후계자|황태녀]]로 책봉 되었고 그녀의 부친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게오르게 3세]]와 섭정 통치를 했다. 그러나 게오르게가 죽은 후에 그녀가 통치권을 계승하고 즉위 하는데 있어서 귀족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마르는 그러한 반대파 귀족들을 중립화 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셀주크 제국|셀주크]]와 [[비잔티움|비잔티움 제국]]의 경쟁 세력들의 몰락이 오히려 도움이 되어 활발한 외교 정책도 펼치게 되었다. 타마르는 강력한 군사 지도층에 의존하여, 그녀의 전임자들의 성공을 기반으로, [[캅카스]]를 지배하는 제국의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제국권은 타마르가 죽은 후 20년도 채 안되어 [[몽골 제국|몽골]]의 침입으로 붕괴했다.<ref name="eastmond-94">Eastmond (1998), p. 9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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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 초기와 첫 번째 결혼 ==
[[파일:Vardzia Chapel fresco.jpg|thumb|180px|left|타마르(왼쪽)와 게오르게 3세(오른쪽).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안식]] 교회에 있는 잔존하는 가장 오래된 타마르의 초상화. 1184~1186년경.]]
타마르는 6년동안 그의 부친이 죽던 1184년까지[[1184년]]까지 섭정했고, 이어서 단일 군주가 되었으며, 조지아 동부의 [[쿠타이시]] 근교에 있는 [[겔라티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그녀는 비교적 강력한 왕국을 승계했지만, 고위급 귀족들에 의해 조장된 중앙집권을 흐트려트려 놓으려는 풍조는 가라 앉을 줄을 몰랐다. 타마르의 계승을 반대하던 심상치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부친이 그들을 억압했던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어 올렸지만, 새로운 군주의 취약점, 즉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더 부추겼던 것이다.<ref name=" Eastmond-108"/> 그녀 전까지만 해도 조지아에서는 여성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일부는 타마르 여왕의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어린 점을 이용해 그녀의 결점이 오히려 그들의 대자치권을 확고히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ref name=" Eastmond-108"/> 타마르의 영향력 있는 고모인 [[루수단 (조지아의 데메트레 1세의 딸)|루수단 여왕]]과 [[조지아의 모든 가톨리코스-파트리아르츠|조지아의 가톨리코스]] 미차엘 4세 미리아니시제의 열정적인 도움은 조지아 왕국을 승계한 타마르 여왕을 합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f>Lordkipanidze (1987), p. 135.</ref> 그녀는 가톨리코스 미차엘의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고, 그리하여 미차엘은 성직과 세속의 공무 체계 양쪽 모두에서 수장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ref name="Suny-39">Suny (1994), p. 39.</ref>
타마르는 그녀의 부친인 게오르게 3세가 그에게 도전하던 귀족들을 엄중 처벌하는데 도움을 줬던 그의 부친이 임명했던 사람들 중에서 낮은 신분 태생의 [[조지아의 킵차크인|조지아인화 된 킵차크인]]인 쿠바사스 보안관의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다.<ref name="Khazanov-49"/> 게오르게 3세가 비천한 신분으로의 숙명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그의 무명의 시중들 중에 한명은 그 때에 새로운 의회인 ''카라비''를 조직해 의회만 따로 떨어져 심사숙고 하여 정책을 결정했던 그렇게 왕권을 제한하려는 투쟁 중에 있었던 귀족 단체들과 부유한 시민들을 이끌던 [[재무 담당자]] [[쿠틀루 아슬란]]이었다.<ref name="Suny-39"/> 타마르가 쿠틀루 아슬란을 체포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구슬려서 항복하게 함으로 "봉건 [[입헌 정치]]"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ref name="Khazanov-49"/> 하지만, 상류층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타마르의 첫 행보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녀는 [[교회 회의]]를 통하여 가톨리코스 미차엘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귀족 의회 ''다르바지''가 국왕 법령의 승인권을 주장했다.<ref name="Suny-39"/> 그녀의 첫 번째 남편 마처도 귀족들에 의하여 강요된 [[루스족]] 왕자 [[유리 보골류프스키]]였다.<ref name="Suny-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