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필드 조병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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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무기 제조와 연구개발의 중추가 되었다. 1819년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5년간 일한 [[토마스 블랜차드]](Thomas Blanchard)는 소총 개머리판의 대량 생산을 위한 특수 선반을 개발하였다. 이 선반은 숙련되지 않은 작업자라도 쉽고 빠르게 이상적인 모양의 개머리판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40년에는 구식 부싯돌 점화방식이 사라지고 격발 점화 방식(percussion ignition system)이 개발되어 소총의 신뢰성과 단순성을 향상시켰다.
 
남북 전쟁(Civil War) 발발 전,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산업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력은 전투중에서전투 중에서 쉽게 총기를 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호환 부속]](interchangeable parts) 개념에 대한 군의 매료 덕택이었다. 이러한 교체 부속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기계류의 사용이 증가될 수밖에 없었고, 계량계측 및 품질관리, 작업인력 배정 등의 혁신이 일어났다. 또한 이러한 각각의 부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조립 라인의 개념이 고안되기도 하였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경영 기술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815년 감독으로 채용된 로스웰 리 대령(Colonel Roswell Lee)은 중앙화된 경영을 도입하여 급여, 작업시간, 자재 및 작업환경 관리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러한 개념들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남북 전쟁으로 하퍼스 페리 조병창이 파괴되면서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20세기까지 유일한 연방 조병창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