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폴리스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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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14세기]] [[왕]]과 [[기사 (군사)|기사]]에 의해 개인적으로 일어난 많은 소규모의 십자군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것은 [[1390년]] [[튀니지]]를 공력하다 실패한 십자군과 아직 [[발트 해]] 연안에서 진행중인진행 중인 북유럽의 [[북방 십자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승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계속 침략해, 겨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과 모레아 일부로 몰아넣었고, 그 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하여 여러 차례 공성전을 진행하였다([[1390년]], [[1395년]], [[1397년]], [[1400년]], [[1422년]]에 공성전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1453년에 정복]]하였다).
 
[[1393년]] [[불가리아]]의 군주 [[이반 시시만]]은 임시 수도였던 [[니코폴 (불가리아)|니코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에게 공격당해 빼앗겼다. 한편 그의 동생이었던 [[이반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그의 영토 [[비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 귀족들과 다른 발칸의 독립적인 지배자들과 군주들의 시각으로 볼 때, 이는 오스만의 정복과정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고,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발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더하여,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치선은 서서히 [[헝가리 왕국]]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헝가리 왕국은 이제 동부 유럽에서 두 종교의 새로운 대치선이 되고 있었고, 헝가리인들은 그들 자신이 공격받을 위협에 처해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모레아]]의 일부 및 [[달마티아]]라 불린 베네치아의 영토를 포함한 발칸반도가 오스만 제국에게 지배당하면 [[아드리아 해]], [[이오니아 해]], [[에게 해]]에서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감소하는것을 두려워했다. 한편 제노바 공화국은 반면에 만약 [[도나우]]강과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양쪽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오스만 제국이 획득한다면, [[카파]], [[시노페]] 등의 제노바가 중요하게 여기는 식민지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흑해]]와 유럽의 교역로을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독점하는것을 위험하다고 보고 있었다. 제노바는 또한 1395년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할 당시 [[금각만]]의 북쪽에 있던 갈라타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을 바야지드 1세에게 기습공격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