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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이찬을 지낸 효종랑의[[김효종 (신라)|효종랑]]의 적자인 경순왕은 사직이 불안정한 때에 대기에 올라 방국 수호의 책무를 지게된 것이다.
 
서라벌로[[서라벌]]로 쳐들어온 직후 신라의[[신라]]의 구원요청으로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몸소 거느리고 온 1만의 기병까지 [[공산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승승장구하던 견훤은[[견훤]]은 [[경순왕]] 4년([[930년]]) 1월의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왕건]]에게 대패하면서 주도권을 고려에 빼앗겼다. 재암성(載巖城)이나 고창(안동부)은 물론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개의 군현과 동해 바닷가의 [[명주군|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에 이르기까지 총 110여 성과 부락이 고려에 항복하는 등 수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상실한 신라는 이미 경주 지역의 지방 정권이나 다름없는 처지였고, 한편으로 고려는 국왕인 왕건이 직접 수도 서라벌을 방문해 경순왕을 찾아 위로하며 "예전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 (王公)이 오니 미덥기가 그지 없다."는 호평을 들을 정도로 서라벌의 민심을 얻었고, 경순왕의 종제 유렴(裕廉)을 질임으로하여 [[개경]]으로 데려가는 등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워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순왕 9년([[935년]]) 10월,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왕건에게 국토를 모두 바치고 항복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신하들의 의논도 엇갈리는 가운데 왕자가 나서서 강하게 반대했다.
 
{{인용문|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br/ >나라의 존망이라는 것이 천명(天命)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br/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