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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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연극 연수를 위해 [[덴마크]], [[독일]]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무대감독으로서는 그다지 명성을 떨치지 못했으나 극장 일을 보면서 실지로 얻은 경험은 나중에 극작에 있어 기술적인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 사이에 아이슬란드 '[[사가 (문학)|사가]]'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속에서 자기의 마음에 통하는 황량함을 발견하고 크리스티아니아에서 《헬게란의 용사들(Hærmændene paa Helgeland, 1857)》을 썼다.
===노르웨이 극장===
1857년, 입센은 크리스티아니아의 노르웨이 극장으로 옮긴다. 국민문학운동에 전념해 [[비외른손]]과 친교를 맺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로,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자살을 꾀하기도 했다고 한다. 1958년에1858년에 베르겐에서 사귄 수잔 토레센과 결혼, 이듬해 외아들인 시구르가 태어났다. 수잔이 입센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하겠으며 이 시기에 쓰여진 《헬겔란트의 해적(1858)》이나 《사랑의 희극(Kjærlighedens Komedie, 1862)》의 여주인공은 그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전자는 아일랜드 전설을 소재로 한 신문극이며, 후자는 당시의 연애풍속을 해학적으로 그린 홀벨그 풍의 운문극으로, 작자는 그 속에서 그 시대의 사회제도, 특히 혼인에 대해 비꼬며 해학을 퍼붓고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목사의 희화화는 보수파로부터의 공격을 야기시켰다.
 
===이탈리아===
1862년 노르웨이 극장은 경영난으로 폐쇄당하였고 몇 번인가 신청한 예술가 연금도 국가로부터 거부당했다. 63년에 주어진 약간의 여비와 비외른손 등의 원조로 입센은 1964년 4월에 조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후 27년 동안을 두고 그는 몇 차례의 짤막한 귀향 기간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돌아가지 않았다.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극작생활에 전념했다. 입센이 외국에 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1864년에 덴마크가 독일, 오스트리아와 승산 없는 전쟁을 했을 때 노르웨이가 참전하지 않고 우방을 돌보지 않았던 점에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은 소년시절에 자랐던 고향에 대한 소외감과 반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