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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품일'''(金品日) 은 [[신라]] [[태종 무열왕]] 때의 장군이다. 화랑 [[관창]]의 아버지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아들 [[관창]]과 함께 출전하였다. [[664년]] [[문무왕]] 때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하였다.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쳐들어갈 때, 귀당총관으로서 공을 세웠으며 [[백제]]의 유민들이 소동을 일으킨 63개의 성을 빼앗았다.
 
== 개설 ==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 생애==
[[660년]] ([[태종무열왕]] 7)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 [[김흠순]](金欽純) 등과 함께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략하였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황산(黃山) 지금의 連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의 결사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에 [[신라]]군은 3군으로 나누어 [[백제]]군과 4번이나 싸웠으나 모두 패퇴함으로써 군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 때 그는 좌장군(左將軍)의 직을 맡고 있으면서 아들 [[관창]]을 불러 오늘 싸움에서 네가 능히 3군의 모범이 되겠는가 하고 묻고 그렇게 하겠다는 그를 단신으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관창]]은 마침내 [[계백]]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고 베어진 그의 머리만 [[계백]]의 선처에 의해 말안장에 매달려 [[신라]]군에게로 되돌아왔다. 김품일은 [[관창]]의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로 옷깃을 적시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면목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다.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본 [[신라]]의 3군은 비분강개하여 백제군으로 진격하여 [[계백]]을 전사시키고 좌평(佐平) 충상(忠常) [[상영]](常永) 등 30여 인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661년]]에 이미 멸망한 [[백제]]의 남은 군사들이 다시 [[사비성]]을 탈환하기 위해 침공하자 왕으로부터 대당장군(大幢將軍)에 임명되어 상주장군(上州將軍)문충(文忠) 하주장군(下州將軍)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였다. 그러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남쪽에서 주둔할 장소를 살피던 중에 [[백제]]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패퇴하였다. 한편 하주군은 빈골양(賓骨壤) 지금의 전라북도 (古阜) 동쪽에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군수품의 손실이 많았다. 이로 인해 이 싸움에서 패배한 [[신라]]의 장군들은 책임의 경중에 따라 왕으로부터 죄를 받았다.
 
== 가족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