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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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8년]] 3년 전부터 직포공의 시민과 농민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플랑드르 백작]]을 원조하여, [[8월 23일]] 카셀에서 반란군에게 승리했다. 다음해 프랑스 왕위 후보자 중 1명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의 왕위를 인정하고, 기엔느의 소유에 대해서 신하로써 복종을 선서했다. 그런데, [[1333년]] 에드워드와 대립하던 [[스코틀랜드]]왕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할때 필리프가 그를 환영하였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이를 치욕으로 여기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였고, [[1337년]]에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340년]] [[6월 23일]] 필리프의 함대는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엄청난 패배를 맞보게 되었다. 다음해 [[칼레]]가 점령을 당하고,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소금의 전매특권을 제정하는것으로제정하는 것으로 이에 대처했으나, 혼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당시 [[흑사병]]이 유행하여 국내가 혼란에 휩싸이는 1350년에 사망하고 아들 [[장 2세]]가 뒤를 이었다.
 
또한 [[1349년]] 그르노블 근처의 도피네를 구입하여, 아들 장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구입성사 이전에 본인이 죽었기 때문에, 손자 샤를(후에 [[샤를 5세]])이 물려받았다. 이후, [[도팽]]은 프랑스 왕태자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 칭호가 되었다.